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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못유원지

수변 산책과 분수쇼, 야경을 한 자리에서 즐기기 ‣ 둘레 2km의 수성못을 따라 바늘꽃, 연꽃, 갈대 등이 어우러진 수변 데크 로드와 울창한 왕벚나무, 버드나무 가로수길이 펼쳐진다 ‣ 밤에는 물 위에 비친 조명이 물감을 풀어 놓은 듯 아름답게 반짝인다. 하루 4회 영상음악분수가 가동되어 볼거리를 더한다 }

문의처053-761-0645
대구스타디움

2002년 한일월드컵 대회, 2003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으며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유치하고 있다. 또한 주변의 수려한 자연환경과 깨끗한 시설로 주변시민들 뿐만 아니라 타지에서도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대구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체육시설을 개방하여 체력단련 및 휴식공간으로 활용할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체육 및 문화예술 행사를 유치하여 시민들에게 한층 더 가까이 다가 가도록 노력하고 있다.}

모명재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 것이다. 조선에 귀화한 후 계산동 일대에 정착한 두사충은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현 대덕산) 밑으로 집을 옮기고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이라 하였다. 모명재라는 이름도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며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좀 더 알아보기>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것이다. 두사충의 호(號)는 모명(募明)으로 중국의 두릉(杜陵)이 고향이다.1592년 임란이 일어나자 그해 12월 명나라 제독(提督)이던 이여송(李如松)등과 함께 원병을 와서, 주위의 지형을 살펴서 진지에 적합한 장소를 만들도록 터를 잡아주는 임무인 수륙지획(水陸地劃) 주사(主事)를 맡았다. 따라서 그는 이여송의 일급 참모로서 항상 군진(軍陳)¹를 펴는데 조언을 했고, 조선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는 조선군과도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가져왔다. 정유재란 때 두 아들과 함께 원병을 와서 공을 세웠는데 난이 평정되고 난 후, 조선에 귀화하였다. 조선에 귀화한 두사충은 대구에 정착하면서 현재의 중앙공원 일대를 하사 받았는데 경상도 감영을 대구에 옮기자 그 땅을 내어놓고 현재의 계산동(桂山洞) 일대로 두씨들의 거주지를 옮겼다. 그러나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最頂山[현 대덕산])밑으로 거주지를 옮겨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이고 단(壇)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관복을 입고 고국의 천자(天子)를 향해 배례(排禮)를 올렸다고 한다. 그의 사후 자손들은 두사충의 유언에 따라 형제봉(兄第峰)기슭에다 묘소를 쓰게 되었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2월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모명재라고 한 것은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고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백천유수필지동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인데 이 것 또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두사충의 묘소앞에 있는 비문을 별도로 다시 새겨 모명재 앞뜰에 신도비를 세웠다. 이 비문은 이순신 장군의 7대손인 삼남 수군통제 이인수가 지었는데, 임란 당시 이순신과 두사충의 친밀한 관계가 후손들에게 까지 접촉을 갖게 했음을 알 수 있다. 모명재는 네모 반듯한 대지에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앞쪽에 모명재가 위치하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 기와집이다. 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들였으며, 앞쪽에는 반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건물 정면의 여모중방(대청앞 마루바닥에 가로지른 안방)밑은 붉은 벽돌을 쌓아막았다. 가구(架構)는 5량가의 견실한 구조로 종보 위에는 원형 판대공을 세웠으며 앞쪽의 창방(목조건물의 기둥 위에 가로 건너질러 연결하고 평방 또는 화반, 소로 등을 받는 가로재)과 장혀(도리를 받치는 긴나무)을 끼워 장식하였다. 20세기 초 대구지역 재실 건축의 형식을 잘 보여준다.}

문의처053-742-3178
국립대구박물관

대구와 경북 지역 문화유산을 보고 체험하는 알찬 공간 ‣ 박물관 실내의 고대문화실, 중세문화실, 섬유복식실, 기획전시실과 야외의 유물 전시장, 유적공원, 토기가마전시장 등을 돌아보며 대구․경북 지역의 문화유산을 관람 ‣ 암각화 찍어보기, 탁본하기, 문화재 조각 맞추기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

파워클라이밍센터

아슬아슬 짜릿한 스포츠 클라이밍 도전! ‣ 다채로운 난이도와 홀더를 보유한 암장에서 스릴 넘치는 암벽타기 ‣ 우수 클라이머를 꾸준히 배출해 낸 유명 실내암장 ‣ 굵은 땀방울이 비 오듯 떨어지고 손가락은 파르르 떨리지만, 힘겹게 정상에 도달했을 때의 쾌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이용시간 14:00~24:00(월~금요일) 새내기 암벽교실 09:00~17:00 (토, 일 중 하루) 입장료 일반 월 60,000원(3개월 16만원, 6개월 30만원) 학생 월 50,000원(3개월 13만원, 6개월 18만원) 일일 회비 : 8,000원 (암벽화, 쵸크 가루 대여료 2,000원 별도) 쿠폰 10장 : 6,000원, 쿠폰 20장 : 100,000원 매월 새내기 암벽교실 (토, 일 중 하루 9시~17시 수강료 : 30,000원) }

문의처053-743-8850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

신축 야구장에서 쾌적하게 야구 관람하기 ‣ 지하철역과 가까워 접근성이 좋고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야구장 ‣ 8각 다이아몬드 형태로 신축해 관람석의 80%가 그늘이라 쾌적한 야구 관람이 가능. 파티플로어, 잔디석, 커플석, 모래놀이석 등 다양한 이벤트석이 있어 아이와 함께 찾은 가족, 커플 등 입맛에 따라 좌석을 고를 수 있다 }

문의처053-780-3300
영영축성비

임진왜란 때 허물어진 대구토성을 돌로 다시 쌓은 후 이를 기념하고자 세운 비이다. 비는 직사각형으로, 바닥돌 위에 비몸을 세운 간단한 모습이다. 비문에 의하면 성의 둘레는 2,145보(步)이며, 네 개의 문을 만들고 성을 지키기 위한 군량, 전포 등을 갖춘 창고를 두었다. 석성의 공사기간은 6개월이며, 동원된 인원은 78,534명에 달한다. 성이 완성된 뒤에는 여러 장사들을 모아 활쏘기대회를 열어 상을 주었다 한다. 광무 10년(1906)에 성은 헐리게 되었고, 비는 1932년 향교로 옮겨 보존되다가 1980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 <좀 더 알아보기> 영영축성비는 조선 영조 13년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 도호부사였던 민응수(閔應洙)가 임진왜란으로 허물어 없어졌던 대구읍성(당시엔 토성)을 석성(石城)으로 축성하고 난 뒤 그 기념으로 세운 것으로 당시 읍성의 규모와 작업상황이 적혀있다. 성을 쌓고 난 뒤 수성(守城)을 위하여 양향(糧餉), 전포(錢布), 기기(器機) 등을 비치한 수성창(守城倉)을 건립하여 불의의 사태와 훗날의 수성에 대비하였다. 축성이 끝나자 여러 장사들을 모아 활쏘기 대회를 열었고 영남 제일관이라 편액이 걸린 남문에 큰 연회를 열어 각기 공로에 따라 시상하였다. 축성에 대한 행상이 끝나자 선화당에서 성대한 낙성 축연을 베풀었고 이듬해인 1737년 2월 상완일(上浣日)에 영영축성비를 건립한 것이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이다. 원래 이 비가 세워진 곳은 남문 밖 관덕정(觀德亭)터였으나 1906년 박중양이 대구 읍성을 헐면서 그 자리를 도로로 만든 까닭에 구 달성군청(현재 대구백화점 옆) 부근으로 옮겼다가 1932년 향교로 이전하여 보관하다가 1980년 다시 현 위치에 옮겨 보존하게 되었다.}

문의처053-666-2172
대구부수성비

조선 고종 때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해 온 김세호가 대구부성을 수리한 후 그 기념으로 세운 비이다. 대구부성은 영조 때 경상관찰사 민응수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는데 그 후 성이 훼손되어도 제대로 보수가 이루어지지 않던 것을 김세호가 수리한 것이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비문에는 공사에 관한 내용과, 유공자에게 상을 내린 일이 적혀 있다. <좀 더 알아보기> 민응수가 대구읍성을 쌓고 난 뒤에 수성창(蓚城倉)을 부분적으로 수리하였으나 근본적인 수리는 못했다. 그러다가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 도호부사로 부임했던 김세호(金世鎬)가 크게 보수하게 되었다. 그는 부임한 이듬해인 1870년(고종 7년) 봄인 3∼4월 경에 수리를 시작하여 그해 11월에 끝냈다고 수성비에 적고 있다. 또, 수성비 비용이 민간 기부금으로 충당했다는 것으로 보아 수금에 있어서 강제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수성비에 의하면 원래 것보다 높이를 더 높이고 확장한 결과 신축이 97보, 개축이 118보, 보축(補築)이 1,409보, 치첩 신축이 2,608보, 문루 및 공해, 신건(新建)이 72간, 중건이 37간, 중수가 57간 공해 각처의 보수가 256간이었다. 이때 동서남북 대문의 문루를 고쳐짓는 것 외에 성벽 위에 6개의 누각을 세웠다. 또, 모든 누(樓)는 단청을 올리고 치첩은 백회(白灰)로 분장하였으며, 공사가 끝난 뒤 성대한 낙성식도 열고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여 유공자를 포상하였다고 수성비는 적고 있다. 현재 영남 제일관문 앞에 영영축성비(嶺營築城碑)와 함께 서 있는 수성비는 당시 관찰사이던 김세호가 글을 짓고 글씨는 수성을 하면서 책응간역(策應看役)으로 있던 절충장군(折衝將軍) 최석로(崔錫魯)가 쓴 것이다. 원래 이 비석이 세워진 곳은 남문 밖 민응수가 영영축성비를 세운 바로 곁이었으나 이 수성비 역시 1906년 대구 읍성이 헐리면서 갈 곳이 없어졌다가 1932년 현재의 대구 향교 경내로 이전되었으나 다시 영남 제일관문이 중건되면서 만촌동으로 이전했다. 청색 화강석인데 팔작지붕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비부는 황백색 화강석으로 장방형이다.}

문의처053-666-2172
수성랜드

1993년대에 문을 연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유원지 시설이며, 대구 시민의 놀이와 휴식의 대명사인 수성유원지의 핵심 시설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새로운 시설과 최고의 서비스로 고객을 모시고 있으며, 고품격 테마파크로의 발전도 기대하고 있다.}

중구

수성못유원지

수변 산책과 분수쇼, 야경을 한 자리에서 즐기기 ‣ 둘레 2km의 수성못을 따라 바늘꽃, 연꽃, 갈대 등이 어우러진 수변 데크 로드와 울창한 왕벚나무, 버드나무 가로수길이 펼쳐진다 ‣ 밤에는 물 위에 비친 조명이 물감을 풀어 놓은 듯 아름답게 반짝인다. 하루 4회 영상음악분수가 가동되어 볼거리를 더한다 }

문의처053-761-0645
대구스타디움

2002년 한일월드컵 대회, 2003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으며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유치하고 있다. 또한 주변의 수려한 자연환경과 깨끗한 시설로 주변시민들 뿐만 아니라 타지에서도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대구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체육시설을 개방하여 체력단련 및 휴식공간으로 활용할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체육 및 문화예술 행사를 유치하여 시민들에게 한층 더 가까이 다가 가도록 노력하고 있다.}

모명재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 것이다. 조선에 귀화한 후 계산동 일대에 정착한 두사충은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현 대덕산) 밑으로 집을 옮기고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이라 하였다. 모명재라는 이름도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며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좀 더 알아보기>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것이다. 두사충의 호(號)는 모명(募明)으로 중국의 두릉(杜陵)이 고향이다.1592년 임란이 일어나자 그해 12월 명나라 제독(提督)이던 이여송(李如松)등과 함께 원병을 와서, 주위의 지형을 살펴서 진지에 적합한 장소를 만들도록 터를 잡아주는 임무인 수륙지획(水陸地劃) 주사(主事)를 맡았다. 따라서 그는 이여송의 일급 참모로서 항상 군진(軍陳)¹를 펴는데 조언을 했고, 조선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는 조선군과도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가져왔다. 정유재란 때 두 아들과 함께 원병을 와서 공을 세웠는데 난이 평정되고 난 후, 조선에 귀화하였다. 조선에 귀화한 두사충은 대구에 정착하면서 현재의 중앙공원 일대를 하사 받았는데 경상도 감영을 대구에 옮기자 그 땅을 내어놓고 현재의 계산동(桂山洞) 일대로 두씨들의 거주지를 옮겼다. 그러나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最頂山[현 대덕산])밑으로 거주지를 옮겨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이고 단(壇)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관복을 입고 고국의 천자(天子)를 향해 배례(排禮)를 올렸다고 한다. 그의 사후 자손들은 두사충의 유언에 따라 형제봉(兄第峰)기슭에다 묘소를 쓰게 되었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2월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모명재라고 한 것은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고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백천유수필지동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인데 이 것 또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두사충의 묘소앞에 있는 비문을 별도로 다시 새겨 모명재 앞뜰에 신도비를 세웠다. 이 비문은 이순신 장군의 7대손인 삼남 수군통제 이인수가 지었는데, 임란 당시 이순신과 두사충의 친밀한 관계가 후손들에게 까지 접촉을 갖게 했음을 알 수 있다. 모명재는 네모 반듯한 대지에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앞쪽에 모명재가 위치하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 기와집이다. 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들였으며, 앞쪽에는 반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건물 정면의 여모중방(대청앞 마루바닥에 가로지른 안방)밑은 붉은 벽돌을 쌓아막았다. 가구(架構)는 5량가의 견실한 구조로 종보 위에는 원형 판대공을 세웠으며 앞쪽의 창방(목조건물의 기둥 위에 가로 건너질러 연결하고 평방 또는 화반, 소로 등을 받는 가로재)과 장혀(도리를 받치는 긴나무)을 끼워 장식하였다. 20세기 초 대구지역 재실 건축의 형식을 잘 보여준다.}

문의처053-742-3178
국립대구박물관

대구와 경북 지역 문화유산을 보고 체험하는 알찬 공간 ‣ 박물관 실내의 고대문화실, 중세문화실, 섬유복식실, 기획전시실과 야외의 유물 전시장, 유적공원, 토기가마전시장 등을 돌아보며 대구․경북 지역의 문화유산을 관람 ‣ 암각화 찍어보기, 탁본하기, 문화재 조각 맞추기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

파워클라이밍센터

아슬아슬 짜릿한 스포츠 클라이밍 도전! ‣ 다채로운 난이도와 홀더를 보유한 암장에서 스릴 넘치는 암벽타기 ‣ 우수 클라이머를 꾸준히 배출해 낸 유명 실내암장 ‣ 굵은 땀방울이 비 오듯 떨어지고 손가락은 파르르 떨리지만, 힘겹게 정상에 도달했을 때의 쾌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이용시간 14:00~24:00(월~금요일) 새내기 암벽교실 09:00~17:00 (토, 일 중 하루) 입장료 일반 월 60,000원(3개월 16만원, 6개월 30만원) 학생 월 50,000원(3개월 13만원, 6개월 18만원) 일일 회비 : 8,000원 (암벽화, 쵸크 가루 대여료 2,000원 별도) 쿠폰 10장 : 6,000원, 쿠폰 20장 : 100,000원 매월 새내기 암벽교실 (토, 일 중 하루 9시~17시 수강료 : 30,000원) }

문의처053-743-8850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

신축 야구장에서 쾌적하게 야구 관람하기 ‣ 지하철역과 가까워 접근성이 좋고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야구장 ‣ 8각 다이아몬드 형태로 신축해 관람석의 80%가 그늘이라 쾌적한 야구 관람이 가능. 파티플로어, 잔디석, 커플석, 모래놀이석 등 다양한 이벤트석이 있어 아이와 함께 찾은 가족, 커플 등 입맛에 따라 좌석을 고를 수 있다 }

문의처053-780-3300
영영축성비

임진왜란 때 허물어진 대구토성을 돌로 다시 쌓은 후 이를 기념하고자 세운 비이다. 비는 직사각형으로, 바닥돌 위에 비몸을 세운 간단한 모습이다. 비문에 의하면 성의 둘레는 2,145보(步)이며, 네 개의 문을 만들고 성을 지키기 위한 군량, 전포 등을 갖춘 창고를 두었다. 석성의 공사기간은 6개월이며, 동원된 인원은 78,534명에 달한다. 성이 완성된 뒤에는 여러 장사들을 모아 활쏘기대회를 열어 상을 주었다 한다. 광무 10년(1906)에 성은 헐리게 되었고, 비는 1932년 향교로 옮겨 보존되다가 1980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 <좀 더 알아보기> 영영축성비는 조선 영조 13년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 도호부사였던 민응수(閔應洙)가 임진왜란으로 허물어 없어졌던 대구읍성(당시엔 토성)을 석성(石城)으로 축성하고 난 뒤 그 기념으로 세운 것으로 당시 읍성의 규모와 작업상황이 적혀있다. 성을 쌓고 난 뒤 수성(守城)을 위하여 양향(糧餉), 전포(錢布), 기기(器機) 등을 비치한 수성창(守城倉)을 건립하여 불의의 사태와 훗날의 수성에 대비하였다. 축성이 끝나자 여러 장사들을 모아 활쏘기 대회를 열었고 영남 제일관이라 편액이 걸린 남문에 큰 연회를 열어 각기 공로에 따라 시상하였다. 축성에 대한 행상이 끝나자 선화당에서 성대한 낙성 축연을 베풀었고 이듬해인 1737년 2월 상완일(上浣日)에 영영축성비를 건립한 것이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이다. 원래 이 비가 세워진 곳은 남문 밖 관덕정(觀德亭)터였으나 1906년 박중양이 대구 읍성을 헐면서 그 자리를 도로로 만든 까닭에 구 달성군청(현재 대구백화점 옆) 부근으로 옮겼다가 1932년 향교로 이전하여 보관하다가 1980년 다시 현 위치에 옮겨 보존하게 되었다.}

문의처053-666-2172
대구부수성비

조선 고종 때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해 온 김세호가 대구부성을 수리한 후 그 기념으로 세운 비이다. 대구부성은 영조 때 경상관찰사 민응수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는데 그 후 성이 훼손되어도 제대로 보수가 이루어지지 않던 것을 김세호가 수리한 것이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비문에는 공사에 관한 내용과, 유공자에게 상을 내린 일이 적혀 있다. <좀 더 알아보기> 민응수가 대구읍성을 쌓고 난 뒤에 수성창(蓚城倉)을 부분적으로 수리하였으나 근본적인 수리는 못했다. 그러다가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 도호부사로 부임했던 김세호(金世鎬)가 크게 보수하게 되었다. 그는 부임한 이듬해인 1870년(고종 7년) 봄인 3∼4월 경에 수리를 시작하여 그해 11월에 끝냈다고 수성비에 적고 있다. 또, 수성비 비용이 민간 기부금으로 충당했다는 것으로 보아 수금에 있어서 강제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수성비에 의하면 원래 것보다 높이를 더 높이고 확장한 결과 신축이 97보, 개축이 118보, 보축(補築)이 1,409보, 치첩 신축이 2,608보, 문루 및 공해, 신건(新建)이 72간, 중건이 37간, 중수가 57간 공해 각처의 보수가 256간이었다. 이때 동서남북 대문의 문루를 고쳐짓는 것 외에 성벽 위에 6개의 누각을 세웠다. 또, 모든 누(樓)는 단청을 올리고 치첩은 백회(白灰)로 분장하였으며, 공사가 끝난 뒤 성대한 낙성식도 열고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여 유공자를 포상하였다고 수성비는 적고 있다. 현재 영남 제일관문 앞에 영영축성비(嶺營築城碑)와 함께 서 있는 수성비는 당시 관찰사이던 김세호가 글을 짓고 글씨는 수성을 하면서 책응간역(策應看役)으로 있던 절충장군(折衝將軍) 최석로(崔錫魯)가 쓴 것이다. 원래 이 비석이 세워진 곳은 남문 밖 민응수가 영영축성비를 세운 바로 곁이었으나 이 수성비 역시 1906년 대구 읍성이 헐리면서 갈 곳이 없어졌다가 1932년 현재의 대구 향교 경내로 이전되었으나 다시 영남 제일관문이 중건되면서 만촌동으로 이전했다. 청색 화강석인데 팔작지붕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비부는 황백색 화강석으로 장방형이다.}

문의처053-666-2172
수성랜드

1993년대에 문을 연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유원지 시설이며, 대구 시민의 놀이와 휴식의 대명사인 수성유원지의 핵심 시설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새로운 시설과 최고의 서비스로 고객을 모시고 있으며, 고품격 테마파크로의 발전도 기대하고 있다.}

동구

수성못유원지

수변 산책과 분수쇼, 야경을 한 자리에서 즐기기 ‣ 둘레 2km의 수성못을 따라 바늘꽃, 연꽃, 갈대 등이 어우러진 수변 데크 로드와 울창한 왕벚나무, 버드나무 가로수길이 펼쳐진다 ‣ 밤에는 물 위에 비친 조명이 물감을 풀어 놓은 듯 아름답게 반짝인다. 하루 4회 영상음악분수가 가동되어 볼거리를 더한다 }

문의처053-761-0645
대구스타디움

2002년 한일월드컵 대회, 2003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으며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유치하고 있다. 또한 주변의 수려한 자연환경과 깨끗한 시설로 주변시민들 뿐만 아니라 타지에서도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대구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체육시설을 개방하여 체력단련 및 휴식공간으로 활용할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체육 및 문화예술 행사를 유치하여 시민들에게 한층 더 가까이 다가 가도록 노력하고 있다.}

모명재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 것이다. 조선에 귀화한 후 계산동 일대에 정착한 두사충은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현 대덕산) 밑으로 집을 옮기고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이라 하였다. 모명재라는 이름도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며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좀 더 알아보기>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것이다. 두사충의 호(號)는 모명(募明)으로 중국의 두릉(杜陵)이 고향이다.1592년 임란이 일어나자 그해 12월 명나라 제독(提督)이던 이여송(李如松)등과 함께 원병을 와서, 주위의 지형을 살펴서 진지에 적합한 장소를 만들도록 터를 잡아주는 임무인 수륙지획(水陸地劃) 주사(主事)를 맡았다. 따라서 그는 이여송의 일급 참모로서 항상 군진(軍陳)¹를 펴는데 조언을 했고, 조선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는 조선군과도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가져왔다. 정유재란 때 두 아들과 함께 원병을 와서 공을 세웠는데 난이 평정되고 난 후, 조선에 귀화하였다. 조선에 귀화한 두사충은 대구에 정착하면서 현재의 중앙공원 일대를 하사 받았는데 경상도 감영을 대구에 옮기자 그 땅을 내어놓고 현재의 계산동(桂山洞) 일대로 두씨들의 거주지를 옮겼다. 그러나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最頂山[현 대덕산])밑으로 거주지를 옮겨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이고 단(壇)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관복을 입고 고국의 천자(天子)를 향해 배례(排禮)를 올렸다고 한다. 그의 사후 자손들은 두사충의 유언에 따라 형제봉(兄第峰)기슭에다 묘소를 쓰게 되었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2월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모명재라고 한 것은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고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백천유수필지동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인데 이 것 또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두사충의 묘소앞에 있는 비문을 별도로 다시 새겨 모명재 앞뜰에 신도비를 세웠다. 이 비문은 이순신 장군의 7대손인 삼남 수군통제 이인수가 지었는데, 임란 당시 이순신과 두사충의 친밀한 관계가 후손들에게 까지 접촉을 갖게 했음을 알 수 있다. 모명재는 네모 반듯한 대지에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앞쪽에 모명재가 위치하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 기와집이다. 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들였으며, 앞쪽에는 반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건물 정면의 여모중방(대청앞 마루바닥에 가로지른 안방)밑은 붉은 벽돌을 쌓아막았다. 가구(架構)는 5량가의 견실한 구조로 종보 위에는 원형 판대공을 세웠으며 앞쪽의 창방(목조건물의 기둥 위에 가로 건너질러 연결하고 평방 또는 화반, 소로 등을 받는 가로재)과 장혀(도리를 받치는 긴나무)을 끼워 장식하였다. 20세기 초 대구지역 재실 건축의 형식을 잘 보여준다.}

문의처053-742-3178
국립대구박물관

대구와 경북 지역 문화유산을 보고 체험하는 알찬 공간 ‣ 박물관 실내의 고대문화실, 중세문화실, 섬유복식실, 기획전시실과 야외의 유물 전시장, 유적공원, 토기가마전시장 등을 돌아보며 대구․경북 지역의 문화유산을 관람 ‣ 암각화 찍어보기, 탁본하기, 문화재 조각 맞추기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

파워클라이밍센터

아슬아슬 짜릿한 스포츠 클라이밍 도전! ‣ 다채로운 난이도와 홀더를 보유한 암장에서 스릴 넘치는 암벽타기 ‣ 우수 클라이머를 꾸준히 배출해 낸 유명 실내암장 ‣ 굵은 땀방울이 비 오듯 떨어지고 손가락은 파르르 떨리지만, 힘겹게 정상에 도달했을 때의 쾌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이용시간 14:00~24:00(월~금요일) 새내기 암벽교실 09:00~17:00 (토, 일 중 하루) 입장료 일반 월 60,000원(3개월 16만원, 6개월 30만원) 학생 월 50,000원(3개월 13만원, 6개월 18만원) 일일 회비 : 8,000원 (암벽화, 쵸크 가루 대여료 2,000원 별도) 쿠폰 10장 : 6,000원, 쿠폰 20장 : 100,000원 매월 새내기 암벽교실 (토, 일 중 하루 9시~17시 수강료 : 30,000원) }

문의처053-743-8850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

신축 야구장에서 쾌적하게 야구 관람하기 ‣ 지하철역과 가까워 접근성이 좋고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야구장 ‣ 8각 다이아몬드 형태로 신축해 관람석의 80%가 그늘이라 쾌적한 야구 관람이 가능. 파티플로어, 잔디석, 커플석, 모래놀이석 등 다양한 이벤트석이 있어 아이와 함께 찾은 가족, 커플 등 입맛에 따라 좌석을 고를 수 있다 }

문의처053-780-3300
영영축성비

임진왜란 때 허물어진 대구토성을 돌로 다시 쌓은 후 이를 기념하고자 세운 비이다. 비는 직사각형으로, 바닥돌 위에 비몸을 세운 간단한 모습이다. 비문에 의하면 성의 둘레는 2,145보(步)이며, 네 개의 문을 만들고 성을 지키기 위한 군량, 전포 등을 갖춘 창고를 두었다. 석성의 공사기간은 6개월이며, 동원된 인원은 78,534명에 달한다. 성이 완성된 뒤에는 여러 장사들을 모아 활쏘기대회를 열어 상을 주었다 한다. 광무 10년(1906)에 성은 헐리게 되었고, 비는 1932년 향교로 옮겨 보존되다가 1980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 <좀 더 알아보기> 영영축성비는 조선 영조 13년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 도호부사였던 민응수(閔應洙)가 임진왜란으로 허물어 없어졌던 대구읍성(당시엔 토성)을 석성(石城)으로 축성하고 난 뒤 그 기념으로 세운 것으로 당시 읍성의 규모와 작업상황이 적혀있다. 성을 쌓고 난 뒤 수성(守城)을 위하여 양향(糧餉), 전포(錢布), 기기(器機) 등을 비치한 수성창(守城倉)을 건립하여 불의의 사태와 훗날의 수성에 대비하였다. 축성이 끝나자 여러 장사들을 모아 활쏘기 대회를 열었고 영남 제일관이라 편액이 걸린 남문에 큰 연회를 열어 각기 공로에 따라 시상하였다. 축성에 대한 행상이 끝나자 선화당에서 성대한 낙성 축연을 베풀었고 이듬해인 1737년 2월 상완일(上浣日)에 영영축성비를 건립한 것이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이다. 원래 이 비가 세워진 곳은 남문 밖 관덕정(觀德亭)터였으나 1906년 박중양이 대구 읍성을 헐면서 그 자리를 도로로 만든 까닭에 구 달성군청(현재 대구백화점 옆) 부근으로 옮겼다가 1932년 향교로 이전하여 보관하다가 1980년 다시 현 위치에 옮겨 보존하게 되었다.}

문의처053-666-2172
대구부수성비

조선 고종 때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해 온 김세호가 대구부성을 수리한 후 그 기념으로 세운 비이다. 대구부성은 영조 때 경상관찰사 민응수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는데 그 후 성이 훼손되어도 제대로 보수가 이루어지지 않던 것을 김세호가 수리한 것이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비문에는 공사에 관한 내용과, 유공자에게 상을 내린 일이 적혀 있다. <좀 더 알아보기> 민응수가 대구읍성을 쌓고 난 뒤에 수성창(蓚城倉)을 부분적으로 수리하였으나 근본적인 수리는 못했다. 그러다가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 도호부사로 부임했던 김세호(金世鎬)가 크게 보수하게 되었다. 그는 부임한 이듬해인 1870년(고종 7년) 봄인 3∼4월 경에 수리를 시작하여 그해 11월에 끝냈다고 수성비에 적고 있다. 또, 수성비 비용이 민간 기부금으로 충당했다는 것으로 보아 수금에 있어서 강제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수성비에 의하면 원래 것보다 높이를 더 높이고 확장한 결과 신축이 97보, 개축이 118보, 보축(補築)이 1,409보, 치첩 신축이 2,608보, 문루 및 공해, 신건(新建)이 72간, 중건이 37간, 중수가 57간 공해 각처의 보수가 256간이었다. 이때 동서남북 대문의 문루를 고쳐짓는 것 외에 성벽 위에 6개의 누각을 세웠다. 또, 모든 누(樓)는 단청을 올리고 치첩은 백회(白灰)로 분장하였으며, 공사가 끝난 뒤 성대한 낙성식도 열고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여 유공자를 포상하였다고 수성비는 적고 있다. 현재 영남 제일관문 앞에 영영축성비(嶺營築城碑)와 함께 서 있는 수성비는 당시 관찰사이던 김세호가 글을 짓고 글씨는 수성을 하면서 책응간역(策應看役)으로 있던 절충장군(折衝將軍) 최석로(崔錫魯)가 쓴 것이다. 원래 이 비석이 세워진 곳은 남문 밖 민응수가 영영축성비를 세운 바로 곁이었으나 이 수성비 역시 1906년 대구 읍성이 헐리면서 갈 곳이 없어졌다가 1932년 현재의 대구 향교 경내로 이전되었으나 다시 영남 제일관문이 중건되면서 만촌동으로 이전했다. 청색 화강석인데 팔작지붕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비부는 황백색 화강석으로 장방형이다.}

문의처053-666-2172
수성랜드

1993년대에 문을 연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유원지 시설이며, 대구 시민의 놀이와 휴식의 대명사인 수성유원지의 핵심 시설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새로운 시설과 최고의 서비스로 고객을 모시고 있으며, 고품격 테마파크로의 발전도 기대하고 있다.}

서구

수성못유원지

수변 산책과 분수쇼, 야경을 한 자리에서 즐기기 ‣ 둘레 2km의 수성못을 따라 바늘꽃, 연꽃, 갈대 등이 어우러진 수변 데크 로드와 울창한 왕벚나무, 버드나무 가로수길이 펼쳐진다 ‣ 밤에는 물 위에 비친 조명이 물감을 풀어 놓은 듯 아름답게 반짝인다. 하루 4회 영상음악분수가 가동되어 볼거리를 더한다 }

문의처053-761-0645
대구스타디움

2002년 한일월드컵 대회, 2003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으며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유치하고 있다. 또한 주변의 수려한 자연환경과 깨끗한 시설로 주변시민들 뿐만 아니라 타지에서도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대구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체육시설을 개방하여 체력단련 및 휴식공간으로 활용할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체육 및 문화예술 행사를 유치하여 시민들에게 한층 더 가까이 다가 가도록 노력하고 있다.}

모명재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 것이다. 조선에 귀화한 후 계산동 일대에 정착한 두사충은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현 대덕산) 밑으로 집을 옮기고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이라 하였다. 모명재라는 이름도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며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좀 더 알아보기>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것이다. 두사충의 호(號)는 모명(募明)으로 중국의 두릉(杜陵)이 고향이다.1592년 임란이 일어나자 그해 12월 명나라 제독(提督)이던 이여송(李如松)등과 함께 원병을 와서, 주위의 지형을 살펴서 진지에 적합한 장소를 만들도록 터를 잡아주는 임무인 수륙지획(水陸地劃) 주사(主事)를 맡았다. 따라서 그는 이여송의 일급 참모로서 항상 군진(軍陳)¹를 펴는데 조언을 했고, 조선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는 조선군과도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가져왔다. 정유재란 때 두 아들과 함께 원병을 와서 공을 세웠는데 난이 평정되고 난 후, 조선에 귀화하였다. 조선에 귀화한 두사충은 대구에 정착하면서 현재의 중앙공원 일대를 하사 받았는데 경상도 감영을 대구에 옮기자 그 땅을 내어놓고 현재의 계산동(桂山洞) 일대로 두씨들의 거주지를 옮겼다. 그러나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最頂山[현 대덕산])밑으로 거주지를 옮겨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이고 단(壇)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관복을 입고 고국의 천자(天子)를 향해 배례(排禮)를 올렸다고 한다. 그의 사후 자손들은 두사충의 유언에 따라 형제봉(兄第峰)기슭에다 묘소를 쓰게 되었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2월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모명재라고 한 것은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고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백천유수필지동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인데 이 것 또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두사충의 묘소앞에 있는 비문을 별도로 다시 새겨 모명재 앞뜰에 신도비를 세웠다. 이 비문은 이순신 장군의 7대손인 삼남 수군통제 이인수가 지었는데, 임란 당시 이순신과 두사충의 친밀한 관계가 후손들에게 까지 접촉을 갖게 했음을 알 수 있다. 모명재는 네모 반듯한 대지에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앞쪽에 모명재가 위치하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 기와집이다. 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들였으며, 앞쪽에는 반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건물 정면의 여모중방(대청앞 마루바닥에 가로지른 안방)밑은 붉은 벽돌을 쌓아막았다. 가구(架構)는 5량가의 견실한 구조로 종보 위에는 원형 판대공을 세웠으며 앞쪽의 창방(목조건물의 기둥 위에 가로 건너질러 연결하고 평방 또는 화반, 소로 등을 받는 가로재)과 장혀(도리를 받치는 긴나무)을 끼워 장식하였다. 20세기 초 대구지역 재실 건축의 형식을 잘 보여준다.}

문의처053-742-3178
국립대구박물관

대구와 경북 지역 문화유산을 보고 체험하는 알찬 공간 ‣ 박물관 실내의 고대문화실, 중세문화실, 섬유복식실, 기획전시실과 야외의 유물 전시장, 유적공원, 토기가마전시장 등을 돌아보며 대구․경북 지역의 문화유산을 관람 ‣ 암각화 찍어보기, 탁본하기, 문화재 조각 맞추기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

파워클라이밍센터

아슬아슬 짜릿한 스포츠 클라이밍 도전! ‣ 다채로운 난이도와 홀더를 보유한 암장에서 스릴 넘치는 암벽타기 ‣ 우수 클라이머를 꾸준히 배출해 낸 유명 실내암장 ‣ 굵은 땀방울이 비 오듯 떨어지고 손가락은 파르르 떨리지만, 힘겹게 정상에 도달했을 때의 쾌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이용시간 14:00~24:00(월~금요일) 새내기 암벽교실 09:00~17:00 (토, 일 중 하루) 입장료 일반 월 60,000원(3개월 16만원, 6개월 30만원) 학생 월 50,000원(3개월 13만원, 6개월 18만원) 일일 회비 : 8,000원 (암벽화, 쵸크 가루 대여료 2,000원 별도) 쿠폰 10장 : 6,000원, 쿠폰 20장 : 100,000원 매월 새내기 암벽교실 (토, 일 중 하루 9시~17시 수강료 : 30,000원) }

문의처053-743-8850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

신축 야구장에서 쾌적하게 야구 관람하기 ‣ 지하철역과 가까워 접근성이 좋고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야구장 ‣ 8각 다이아몬드 형태로 신축해 관람석의 80%가 그늘이라 쾌적한 야구 관람이 가능. 파티플로어, 잔디석, 커플석, 모래놀이석 등 다양한 이벤트석이 있어 아이와 함께 찾은 가족, 커플 등 입맛에 따라 좌석을 고를 수 있다 }

문의처053-780-3300
영영축성비

임진왜란 때 허물어진 대구토성을 돌로 다시 쌓은 후 이를 기념하고자 세운 비이다. 비는 직사각형으로, 바닥돌 위에 비몸을 세운 간단한 모습이다. 비문에 의하면 성의 둘레는 2,145보(步)이며, 네 개의 문을 만들고 성을 지키기 위한 군량, 전포 등을 갖춘 창고를 두었다. 석성의 공사기간은 6개월이며, 동원된 인원은 78,534명에 달한다. 성이 완성된 뒤에는 여러 장사들을 모아 활쏘기대회를 열어 상을 주었다 한다. 광무 10년(1906)에 성은 헐리게 되었고, 비는 1932년 향교로 옮겨 보존되다가 1980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 <좀 더 알아보기> 영영축성비는 조선 영조 13년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 도호부사였던 민응수(閔應洙)가 임진왜란으로 허물어 없어졌던 대구읍성(당시엔 토성)을 석성(石城)으로 축성하고 난 뒤 그 기념으로 세운 것으로 당시 읍성의 규모와 작업상황이 적혀있다. 성을 쌓고 난 뒤 수성(守城)을 위하여 양향(糧餉), 전포(錢布), 기기(器機) 등을 비치한 수성창(守城倉)을 건립하여 불의의 사태와 훗날의 수성에 대비하였다. 축성이 끝나자 여러 장사들을 모아 활쏘기 대회를 열었고 영남 제일관이라 편액이 걸린 남문에 큰 연회를 열어 각기 공로에 따라 시상하였다. 축성에 대한 행상이 끝나자 선화당에서 성대한 낙성 축연을 베풀었고 이듬해인 1737년 2월 상완일(上浣日)에 영영축성비를 건립한 것이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이다. 원래 이 비가 세워진 곳은 남문 밖 관덕정(觀德亭)터였으나 1906년 박중양이 대구 읍성을 헐면서 그 자리를 도로로 만든 까닭에 구 달성군청(현재 대구백화점 옆) 부근으로 옮겼다가 1932년 향교로 이전하여 보관하다가 1980년 다시 현 위치에 옮겨 보존하게 되었다.}

문의처053-666-2172
대구부수성비

조선 고종 때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해 온 김세호가 대구부성을 수리한 후 그 기념으로 세운 비이다. 대구부성은 영조 때 경상관찰사 민응수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는데 그 후 성이 훼손되어도 제대로 보수가 이루어지지 않던 것을 김세호가 수리한 것이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비문에는 공사에 관한 내용과, 유공자에게 상을 내린 일이 적혀 있다. <좀 더 알아보기> 민응수가 대구읍성을 쌓고 난 뒤에 수성창(蓚城倉)을 부분적으로 수리하였으나 근본적인 수리는 못했다. 그러다가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 도호부사로 부임했던 김세호(金世鎬)가 크게 보수하게 되었다. 그는 부임한 이듬해인 1870년(고종 7년) 봄인 3∼4월 경에 수리를 시작하여 그해 11월에 끝냈다고 수성비에 적고 있다. 또, 수성비 비용이 민간 기부금으로 충당했다는 것으로 보아 수금에 있어서 강제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수성비에 의하면 원래 것보다 높이를 더 높이고 확장한 결과 신축이 97보, 개축이 118보, 보축(補築)이 1,409보, 치첩 신축이 2,608보, 문루 및 공해, 신건(新建)이 72간, 중건이 37간, 중수가 57간 공해 각처의 보수가 256간이었다. 이때 동서남북 대문의 문루를 고쳐짓는 것 외에 성벽 위에 6개의 누각을 세웠다. 또, 모든 누(樓)는 단청을 올리고 치첩은 백회(白灰)로 분장하였으며, 공사가 끝난 뒤 성대한 낙성식도 열고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여 유공자를 포상하였다고 수성비는 적고 있다. 현재 영남 제일관문 앞에 영영축성비(嶺營築城碑)와 함께 서 있는 수성비는 당시 관찰사이던 김세호가 글을 짓고 글씨는 수성을 하면서 책응간역(策應看役)으로 있던 절충장군(折衝將軍) 최석로(崔錫魯)가 쓴 것이다. 원래 이 비석이 세워진 곳은 남문 밖 민응수가 영영축성비를 세운 바로 곁이었으나 이 수성비 역시 1906년 대구 읍성이 헐리면서 갈 곳이 없어졌다가 1932년 현재의 대구 향교 경내로 이전되었으나 다시 영남 제일관문이 중건되면서 만촌동으로 이전했다. 청색 화강석인데 팔작지붕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비부는 황백색 화강석으로 장방형이다.}

문의처053-666-2172
수성랜드

1993년대에 문을 연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유원지 시설이며, 대구 시민의 놀이와 휴식의 대명사인 수성유원지의 핵심 시설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새로운 시설과 최고의 서비스로 고객을 모시고 있으며, 고품격 테마파크로의 발전도 기대하고 있다.}

남구

수성못유원지

수변 산책과 분수쇼, 야경을 한 자리에서 즐기기 ‣ 둘레 2km의 수성못을 따라 바늘꽃, 연꽃, 갈대 등이 어우러진 수변 데크 로드와 울창한 왕벚나무, 버드나무 가로수길이 펼쳐진다 ‣ 밤에는 물 위에 비친 조명이 물감을 풀어 놓은 듯 아름답게 반짝인다. 하루 4회 영상음악분수가 가동되어 볼거리를 더한다 }

문의처053-761-0645
대구스타디움

2002년 한일월드컵 대회, 2003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으며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유치하고 있다. 또한 주변의 수려한 자연환경과 깨끗한 시설로 주변시민들 뿐만 아니라 타지에서도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대구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체육시설을 개방하여 체력단련 및 휴식공간으로 활용할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체육 및 문화예술 행사를 유치하여 시민들에게 한층 더 가까이 다가 가도록 노력하고 있다.}

모명재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 것이다. 조선에 귀화한 후 계산동 일대에 정착한 두사충은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현 대덕산) 밑으로 집을 옮기고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이라 하였다. 모명재라는 이름도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며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좀 더 알아보기>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것이다. 두사충의 호(號)는 모명(募明)으로 중국의 두릉(杜陵)이 고향이다.1592년 임란이 일어나자 그해 12월 명나라 제독(提督)이던 이여송(李如松)등과 함께 원병을 와서, 주위의 지형을 살펴서 진지에 적합한 장소를 만들도록 터를 잡아주는 임무인 수륙지획(水陸地劃) 주사(主事)를 맡았다. 따라서 그는 이여송의 일급 참모로서 항상 군진(軍陳)¹를 펴는데 조언을 했고, 조선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는 조선군과도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가져왔다. 정유재란 때 두 아들과 함께 원병을 와서 공을 세웠는데 난이 평정되고 난 후, 조선에 귀화하였다. 조선에 귀화한 두사충은 대구에 정착하면서 현재의 중앙공원 일대를 하사 받았는데 경상도 감영을 대구에 옮기자 그 땅을 내어놓고 현재의 계산동(桂山洞) 일대로 두씨들의 거주지를 옮겼다. 그러나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最頂山[현 대덕산])밑으로 거주지를 옮겨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이고 단(壇)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관복을 입고 고국의 천자(天子)를 향해 배례(排禮)를 올렸다고 한다. 그의 사후 자손들은 두사충의 유언에 따라 형제봉(兄第峰)기슭에다 묘소를 쓰게 되었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2월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모명재라고 한 것은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고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백천유수필지동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인데 이 것 또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두사충의 묘소앞에 있는 비문을 별도로 다시 새겨 모명재 앞뜰에 신도비를 세웠다. 이 비문은 이순신 장군의 7대손인 삼남 수군통제 이인수가 지었는데, 임란 당시 이순신과 두사충의 친밀한 관계가 후손들에게 까지 접촉을 갖게 했음을 알 수 있다. 모명재는 네모 반듯한 대지에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앞쪽에 모명재가 위치하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 기와집이다. 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들였으며, 앞쪽에는 반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건물 정면의 여모중방(대청앞 마루바닥에 가로지른 안방)밑은 붉은 벽돌을 쌓아막았다. 가구(架構)는 5량가의 견실한 구조로 종보 위에는 원형 판대공을 세웠으며 앞쪽의 창방(목조건물의 기둥 위에 가로 건너질러 연결하고 평방 또는 화반, 소로 등을 받는 가로재)과 장혀(도리를 받치는 긴나무)을 끼워 장식하였다. 20세기 초 대구지역 재실 건축의 형식을 잘 보여준다.}

문의처053-742-3178
국립대구박물관

대구와 경북 지역 문화유산을 보고 체험하는 알찬 공간 ‣ 박물관 실내의 고대문화실, 중세문화실, 섬유복식실, 기획전시실과 야외의 유물 전시장, 유적공원, 토기가마전시장 등을 돌아보며 대구․경북 지역의 문화유산을 관람 ‣ 암각화 찍어보기, 탁본하기, 문화재 조각 맞추기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

파워클라이밍센터

아슬아슬 짜릿한 스포츠 클라이밍 도전! ‣ 다채로운 난이도와 홀더를 보유한 암장에서 스릴 넘치는 암벽타기 ‣ 우수 클라이머를 꾸준히 배출해 낸 유명 실내암장 ‣ 굵은 땀방울이 비 오듯 떨어지고 손가락은 파르르 떨리지만, 힘겹게 정상에 도달했을 때의 쾌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이용시간 14:00~24:00(월~금요일) 새내기 암벽교실 09:00~17:00 (토, 일 중 하루) 입장료 일반 월 60,000원(3개월 16만원, 6개월 30만원) 학생 월 50,000원(3개월 13만원, 6개월 18만원) 일일 회비 : 8,000원 (암벽화, 쵸크 가루 대여료 2,000원 별도) 쿠폰 10장 : 6,000원, 쿠폰 20장 : 100,000원 매월 새내기 암벽교실 (토, 일 중 하루 9시~17시 수강료 : 30,000원) }

문의처053-743-8850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

신축 야구장에서 쾌적하게 야구 관람하기 ‣ 지하철역과 가까워 접근성이 좋고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야구장 ‣ 8각 다이아몬드 형태로 신축해 관람석의 80%가 그늘이라 쾌적한 야구 관람이 가능. 파티플로어, 잔디석, 커플석, 모래놀이석 등 다양한 이벤트석이 있어 아이와 함께 찾은 가족, 커플 등 입맛에 따라 좌석을 고를 수 있다 }

문의처053-780-3300
영영축성비

임진왜란 때 허물어진 대구토성을 돌로 다시 쌓은 후 이를 기념하고자 세운 비이다. 비는 직사각형으로, 바닥돌 위에 비몸을 세운 간단한 모습이다. 비문에 의하면 성의 둘레는 2,145보(步)이며, 네 개의 문을 만들고 성을 지키기 위한 군량, 전포 등을 갖춘 창고를 두었다. 석성의 공사기간은 6개월이며, 동원된 인원은 78,534명에 달한다. 성이 완성된 뒤에는 여러 장사들을 모아 활쏘기대회를 열어 상을 주었다 한다. 광무 10년(1906)에 성은 헐리게 되었고, 비는 1932년 향교로 옮겨 보존되다가 1980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 <좀 더 알아보기> 영영축성비는 조선 영조 13년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 도호부사였던 민응수(閔應洙)가 임진왜란으로 허물어 없어졌던 대구읍성(당시엔 토성)을 석성(石城)으로 축성하고 난 뒤 그 기념으로 세운 것으로 당시 읍성의 규모와 작업상황이 적혀있다. 성을 쌓고 난 뒤 수성(守城)을 위하여 양향(糧餉), 전포(錢布), 기기(器機) 등을 비치한 수성창(守城倉)을 건립하여 불의의 사태와 훗날의 수성에 대비하였다. 축성이 끝나자 여러 장사들을 모아 활쏘기 대회를 열었고 영남 제일관이라 편액이 걸린 남문에 큰 연회를 열어 각기 공로에 따라 시상하였다. 축성에 대한 행상이 끝나자 선화당에서 성대한 낙성 축연을 베풀었고 이듬해인 1737년 2월 상완일(上浣日)에 영영축성비를 건립한 것이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이다. 원래 이 비가 세워진 곳은 남문 밖 관덕정(觀德亭)터였으나 1906년 박중양이 대구 읍성을 헐면서 그 자리를 도로로 만든 까닭에 구 달성군청(현재 대구백화점 옆) 부근으로 옮겼다가 1932년 향교로 이전하여 보관하다가 1980년 다시 현 위치에 옮겨 보존하게 되었다.}

문의처053-666-2172
대구부수성비

조선 고종 때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해 온 김세호가 대구부성을 수리한 후 그 기념으로 세운 비이다. 대구부성은 영조 때 경상관찰사 민응수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는데 그 후 성이 훼손되어도 제대로 보수가 이루어지지 않던 것을 김세호가 수리한 것이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비문에는 공사에 관한 내용과, 유공자에게 상을 내린 일이 적혀 있다. <좀 더 알아보기> 민응수가 대구읍성을 쌓고 난 뒤에 수성창(蓚城倉)을 부분적으로 수리하였으나 근본적인 수리는 못했다. 그러다가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 도호부사로 부임했던 김세호(金世鎬)가 크게 보수하게 되었다. 그는 부임한 이듬해인 1870년(고종 7년) 봄인 3∼4월 경에 수리를 시작하여 그해 11월에 끝냈다고 수성비에 적고 있다. 또, 수성비 비용이 민간 기부금으로 충당했다는 것으로 보아 수금에 있어서 강제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수성비에 의하면 원래 것보다 높이를 더 높이고 확장한 결과 신축이 97보, 개축이 118보, 보축(補築)이 1,409보, 치첩 신축이 2,608보, 문루 및 공해, 신건(新建)이 72간, 중건이 37간, 중수가 57간 공해 각처의 보수가 256간이었다. 이때 동서남북 대문의 문루를 고쳐짓는 것 외에 성벽 위에 6개의 누각을 세웠다. 또, 모든 누(樓)는 단청을 올리고 치첩은 백회(白灰)로 분장하였으며, 공사가 끝난 뒤 성대한 낙성식도 열고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여 유공자를 포상하였다고 수성비는 적고 있다. 현재 영남 제일관문 앞에 영영축성비(嶺營築城碑)와 함께 서 있는 수성비는 당시 관찰사이던 김세호가 글을 짓고 글씨는 수성을 하면서 책응간역(策應看役)으로 있던 절충장군(折衝將軍) 최석로(崔錫魯)가 쓴 것이다. 원래 이 비석이 세워진 곳은 남문 밖 민응수가 영영축성비를 세운 바로 곁이었으나 이 수성비 역시 1906년 대구 읍성이 헐리면서 갈 곳이 없어졌다가 1932년 현재의 대구 향교 경내로 이전되었으나 다시 영남 제일관문이 중건되면서 만촌동으로 이전했다. 청색 화강석인데 팔작지붕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비부는 황백색 화강석으로 장방형이다.}

문의처053-666-2172
수성랜드

1993년대에 문을 연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유원지 시설이며, 대구 시민의 놀이와 휴식의 대명사인 수성유원지의 핵심 시설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새로운 시설과 최고의 서비스로 고객을 모시고 있으며, 고품격 테마파크로의 발전도 기대하고 있다.}

북구

수성못유원지

수변 산책과 분수쇼, 야경을 한 자리에서 즐기기 ‣ 둘레 2km의 수성못을 따라 바늘꽃, 연꽃, 갈대 등이 어우러진 수변 데크 로드와 울창한 왕벚나무, 버드나무 가로수길이 펼쳐진다 ‣ 밤에는 물 위에 비친 조명이 물감을 풀어 놓은 듯 아름답게 반짝인다. 하루 4회 영상음악분수가 가동되어 볼거리를 더한다 }

문의처053-761-0645
대구스타디움

2002년 한일월드컵 대회, 2003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으며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유치하고 있다. 또한 주변의 수려한 자연환경과 깨끗한 시설로 주변시민들 뿐만 아니라 타지에서도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대구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체육시설을 개방하여 체력단련 및 휴식공간으로 활용할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체육 및 문화예술 행사를 유치하여 시민들에게 한층 더 가까이 다가 가도록 노력하고 있다.}

모명재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 것이다. 조선에 귀화한 후 계산동 일대에 정착한 두사충은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현 대덕산) 밑으로 집을 옮기고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이라 하였다. 모명재라는 이름도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며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좀 더 알아보기>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것이다. 두사충의 호(號)는 모명(募明)으로 중국의 두릉(杜陵)이 고향이다.1592년 임란이 일어나자 그해 12월 명나라 제독(提督)이던 이여송(李如松)등과 함께 원병을 와서, 주위의 지형을 살펴서 진지에 적합한 장소를 만들도록 터를 잡아주는 임무인 수륙지획(水陸地劃) 주사(主事)를 맡았다. 따라서 그는 이여송의 일급 참모로서 항상 군진(軍陳)¹를 펴는데 조언을 했고, 조선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는 조선군과도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가져왔다. 정유재란 때 두 아들과 함께 원병을 와서 공을 세웠는데 난이 평정되고 난 후, 조선에 귀화하였다. 조선에 귀화한 두사충은 대구에 정착하면서 현재의 중앙공원 일대를 하사 받았는데 경상도 감영을 대구에 옮기자 그 땅을 내어놓고 현재의 계산동(桂山洞) 일대로 두씨들의 거주지를 옮겼다. 그러나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最頂山[현 대덕산])밑으로 거주지를 옮겨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이고 단(壇)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관복을 입고 고국의 천자(天子)를 향해 배례(排禮)를 올렸다고 한다. 그의 사후 자손들은 두사충의 유언에 따라 형제봉(兄第峰)기슭에다 묘소를 쓰게 되었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2월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모명재라고 한 것은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고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백천유수필지동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인데 이 것 또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두사충의 묘소앞에 있는 비문을 별도로 다시 새겨 모명재 앞뜰에 신도비를 세웠다. 이 비문은 이순신 장군의 7대손인 삼남 수군통제 이인수가 지었는데, 임란 당시 이순신과 두사충의 친밀한 관계가 후손들에게 까지 접촉을 갖게 했음을 알 수 있다. 모명재는 네모 반듯한 대지에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앞쪽에 모명재가 위치하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 기와집이다. 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들였으며, 앞쪽에는 반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건물 정면의 여모중방(대청앞 마루바닥에 가로지른 안방)밑은 붉은 벽돌을 쌓아막았다. 가구(架構)는 5량가의 견실한 구조로 종보 위에는 원형 판대공을 세웠으며 앞쪽의 창방(목조건물의 기둥 위에 가로 건너질러 연결하고 평방 또는 화반, 소로 등을 받는 가로재)과 장혀(도리를 받치는 긴나무)을 끼워 장식하였다. 20세기 초 대구지역 재실 건축의 형식을 잘 보여준다.}

문의처053-742-3178
국립대구박물관

대구와 경북 지역 문화유산을 보고 체험하는 알찬 공간 ‣ 박물관 실내의 고대문화실, 중세문화실, 섬유복식실, 기획전시실과 야외의 유물 전시장, 유적공원, 토기가마전시장 등을 돌아보며 대구․경북 지역의 문화유산을 관람 ‣ 암각화 찍어보기, 탁본하기, 문화재 조각 맞추기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

파워클라이밍센터

아슬아슬 짜릿한 스포츠 클라이밍 도전! ‣ 다채로운 난이도와 홀더를 보유한 암장에서 스릴 넘치는 암벽타기 ‣ 우수 클라이머를 꾸준히 배출해 낸 유명 실내암장 ‣ 굵은 땀방울이 비 오듯 떨어지고 손가락은 파르르 떨리지만, 힘겹게 정상에 도달했을 때의 쾌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이용시간 14:00~24:00(월~금요일) 새내기 암벽교실 09:00~17:00 (토, 일 중 하루) 입장료 일반 월 60,000원(3개월 16만원, 6개월 30만원) 학생 월 50,000원(3개월 13만원, 6개월 18만원) 일일 회비 : 8,000원 (암벽화, 쵸크 가루 대여료 2,000원 별도) 쿠폰 10장 : 6,000원, 쿠폰 20장 : 100,000원 매월 새내기 암벽교실 (토, 일 중 하루 9시~17시 수강료 : 30,000원) }

문의처053-743-8850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

신축 야구장에서 쾌적하게 야구 관람하기 ‣ 지하철역과 가까워 접근성이 좋고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야구장 ‣ 8각 다이아몬드 형태로 신축해 관람석의 80%가 그늘이라 쾌적한 야구 관람이 가능. 파티플로어, 잔디석, 커플석, 모래놀이석 등 다양한 이벤트석이 있어 아이와 함께 찾은 가족, 커플 등 입맛에 따라 좌석을 고를 수 있다 }

문의처053-780-3300
영영축성비

임진왜란 때 허물어진 대구토성을 돌로 다시 쌓은 후 이를 기념하고자 세운 비이다. 비는 직사각형으로, 바닥돌 위에 비몸을 세운 간단한 모습이다. 비문에 의하면 성의 둘레는 2,145보(步)이며, 네 개의 문을 만들고 성을 지키기 위한 군량, 전포 등을 갖춘 창고를 두었다. 석성의 공사기간은 6개월이며, 동원된 인원은 78,534명에 달한다. 성이 완성된 뒤에는 여러 장사들을 모아 활쏘기대회를 열어 상을 주었다 한다. 광무 10년(1906)에 성은 헐리게 되었고, 비는 1932년 향교로 옮겨 보존되다가 1980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 <좀 더 알아보기> 영영축성비는 조선 영조 13년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 도호부사였던 민응수(閔應洙)가 임진왜란으로 허물어 없어졌던 대구읍성(당시엔 토성)을 석성(石城)으로 축성하고 난 뒤 그 기념으로 세운 것으로 당시 읍성의 규모와 작업상황이 적혀있다. 성을 쌓고 난 뒤 수성(守城)을 위하여 양향(糧餉), 전포(錢布), 기기(器機) 등을 비치한 수성창(守城倉)을 건립하여 불의의 사태와 훗날의 수성에 대비하였다. 축성이 끝나자 여러 장사들을 모아 활쏘기 대회를 열었고 영남 제일관이라 편액이 걸린 남문에 큰 연회를 열어 각기 공로에 따라 시상하였다. 축성에 대한 행상이 끝나자 선화당에서 성대한 낙성 축연을 베풀었고 이듬해인 1737년 2월 상완일(上浣日)에 영영축성비를 건립한 것이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이다. 원래 이 비가 세워진 곳은 남문 밖 관덕정(觀德亭)터였으나 1906년 박중양이 대구 읍성을 헐면서 그 자리를 도로로 만든 까닭에 구 달성군청(현재 대구백화점 옆) 부근으로 옮겼다가 1932년 향교로 이전하여 보관하다가 1980년 다시 현 위치에 옮겨 보존하게 되었다.}

문의처053-666-2172
대구부수성비

조선 고종 때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해 온 김세호가 대구부성을 수리한 후 그 기념으로 세운 비이다. 대구부성은 영조 때 경상관찰사 민응수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는데 그 후 성이 훼손되어도 제대로 보수가 이루어지지 않던 것을 김세호가 수리한 것이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비문에는 공사에 관한 내용과, 유공자에게 상을 내린 일이 적혀 있다. <좀 더 알아보기> 민응수가 대구읍성을 쌓고 난 뒤에 수성창(蓚城倉)을 부분적으로 수리하였으나 근본적인 수리는 못했다. 그러다가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 도호부사로 부임했던 김세호(金世鎬)가 크게 보수하게 되었다. 그는 부임한 이듬해인 1870년(고종 7년) 봄인 3∼4월 경에 수리를 시작하여 그해 11월에 끝냈다고 수성비에 적고 있다. 또, 수성비 비용이 민간 기부금으로 충당했다는 것으로 보아 수금에 있어서 강제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수성비에 의하면 원래 것보다 높이를 더 높이고 확장한 결과 신축이 97보, 개축이 118보, 보축(補築)이 1,409보, 치첩 신축이 2,608보, 문루 및 공해, 신건(新建)이 72간, 중건이 37간, 중수가 57간 공해 각처의 보수가 256간이었다. 이때 동서남북 대문의 문루를 고쳐짓는 것 외에 성벽 위에 6개의 누각을 세웠다. 또, 모든 누(樓)는 단청을 올리고 치첩은 백회(白灰)로 분장하였으며, 공사가 끝난 뒤 성대한 낙성식도 열고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여 유공자를 포상하였다고 수성비는 적고 있다. 현재 영남 제일관문 앞에 영영축성비(嶺營築城碑)와 함께 서 있는 수성비는 당시 관찰사이던 김세호가 글을 짓고 글씨는 수성을 하면서 책응간역(策應看役)으로 있던 절충장군(折衝將軍) 최석로(崔錫魯)가 쓴 것이다. 원래 이 비석이 세워진 곳은 남문 밖 민응수가 영영축성비를 세운 바로 곁이었으나 이 수성비 역시 1906년 대구 읍성이 헐리면서 갈 곳이 없어졌다가 1932년 현재의 대구 향교 경내로 이전되었으나 다시 영남 제일관문이 중건되면서 만촌동으로 이전했다. 청색 화강석인데 팔작지붕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비부는 황백색 화강석으로 장방형이다.}

문의처053-666-2172
수성랜드

1993년대에 문을 연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유원지 시설이며, 대구 시민의 놀이와 휴식의 대명사인 수성유원지의 핵심 시설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새로운 시설과 최고의 서비스로 고객을 모시고 있으며, 고품격 테마파크로의 발전도 기대하고 있다.}

수성구

수성못유원지

수변 산책과 분수쇼, 야경을 한 자리에서 즐기기 ‣ 둘레 2km의 수성못을 따라 바늘꽃, 연꽃, 갈대 등이 어우러진 수변 데크 로드와 울창한 왕벚나무, 버드나무 가로수길이 펼쳐진다 ‣ 밤에는 물 위에 비친 조명이 물감을 풀어 놓은 듯 아름답게 반짝인다. 하루 4회 영상음악분수가 가동되어 볼거리를 더한다 }

문의처053-761-0645
대구스타디움

2002년 한일월드컵 대회, 2003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으며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유치하고 있다. 또한 주변의 수려한 자연환경과 깨끗한 시설로 주변시민들 뿐만 아니라 타지에서도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대구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체육시설을 개방하여 체력단련 및 휴식공간으로 활용할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체육 및 문화예술 행사를 유치하여 시민들에게 한층 더 가까이 다가 가도록 노력하고 있다.}

모명재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 것이다. 조선에 귀화한 후 계산동 일대에 정착한 두사충은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현 대덕산) 밑으로 집을 옮기고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이라 하였다. 모명재라는 이름도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며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좀 더 알아보기>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것이다. 두사충의 호(號)는 모명(募明)으로 중국의 두릉(杜陵)이 고향이다.1592년 임란이 일어나자 그해 12월 명나라 제독(提督)이던 이여송(李如松)등과 함께 원병을 와서, 주위의 지형을 살펴서 진지에 적합한 장소를 만들도록 터를 잡아주는 임무인 수륙지획(水陸地劃) 주사(主事)를 맡았다. 따라서 그는 이여송의 일급 참모로서 항상 군진(軍陳)¹를 펴는데 조언을 했고, 조선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는 조선군과도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가져왔다. 정유재란 때 두 아들과 함께 원병을 와서 공을 세웠는데 난이 평정되고 난 후, 조선에 귀화하였다. 조선에 귀화한 두사충은 대구에 정착하면서 현재의 중앙공원 일대를 하사 받았는데 경상도 감영을 대구에 옮기자 그 땅을 내어놓고 현재의 계산동(桂山洞) 일대로 두씨들의 거주지를 옮겼다. 그러나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最頂山[현 대덕산])밑으로 거주지를 옮겨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이고 단(壇)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관복을 입고 고국의 천자(天子)를 향해 배례(排禮)를 올렸다고 한다. 그의 사후 자손들은 두사충의 유언에 따라 형제봉(兄第峰)기슭에다 묘소를 쓰게 되었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2월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모명재라고 한 것은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고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백천유수필지동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인데 이 것 또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두사충의 묘소앞에 있는 비문을 별도로 다시 새겨 모명재 앞뜰에 신도비를 세웠다. 이 비문은 이순신 장군의 7대손인 삼남 수군통제 이인수가 지었는데, 임란 당시 이순신과 두사충의 친밀한 관계가 후손들에게 까지 접촉을 갖게 했음을 알 수 있다. 모명재는 네모 반듯한 대지에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앞쪽에 모명재가 위치하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 기와집이다. 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들였으며, 앞쪽에는 반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건물 정면의 여모중방(대청앞 마루바닥에 가로지른 안방)밑은 붉은 벽돌을 쌓아막았다. 가구(架構)는 5량가의 견실한 구조로 종보 위에는 원형 판대공을 세웠으며 앞쪽의 창방(목조건물의 기둥 위에 가로 건너질러 연결하고 평방 또는 화반, 소로 등을 받는 가로재)과 장혀(도리를 받치는 긴나무)을 끼워 장식하였다. 20세기 초 대구지역 재실 건축의 형식을 잘 보여준다.}

문의처053-742-3178
국립대구박물관

대구와 경북 지역 문화유산을 보고 체험하는 알찬 공간 ‣ 박물관 실내의 고대문화실, 중세문화실, 섬유복식실, 기획전시실과 야외의 유물 전시장, 유적공원, 토기가마전시장 등을 돌아보며 대구․경북 지역의 문화유산을 관람 ‣ 암각화 찍어보기, 탁본하기, 문화재 조각 맞추기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

파워클라이밍센터

아슬아슬 짜릿한 스포츠 클라이밍 도전! ‣ 다채로운 난이도와 홀더를 보유한 암장에서 스릴 넘치는 암벽타기 ‣ 우수 클라이머를 꾸준히 배출해 낸 유명 실내암장 ‣ 굵은 땀방울이 비 오듯 떨어지고 손가락은 파르르 떨리지만, 힘겹게 정상에 도달했을 때의 쾌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이용시간 14:00~24:00(월~금요일) 새내기 암벽교실 09:00~17:00 (토, 일 중 하루) 입장료 일반 월 60,000원(3개월 16만원, 6개월 30만원) 학생 월 50,000원(3개월 13만원, 6개월 18만원) 일일 회비 : 8,000원 (암벽화, 쵸크 가루 대여료 2,000원 별도) 쿠폰 10장 : 6,000원, 쿠폰 20장 : 100,000원 매월 새내기 암벽교실 (토, 일 중 하루 9시~17시 수강료 : 30,000원) }

문의처053-743-8850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

신축 야구장에서 쾌적하게 야구 관람하기 ‣ 지하철역과 가까워 접근성이 좋고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야구장 ‣ 8각 다이아몬드 형태로 신축해 관람석의 80%가 그늘이라 쾌적한 야구 관람이 가능. 파티플로어, 잔디석, 커플석, 모래놀이석 등 다양한 이벤트석이 있어 아이와 함께 찾은 가족, 커플 등 입맛에 따라 좌석을 고를 수 있다 }

문의처053-780-3300
영영축성비

임진왜란 때 허물어진 대구토성을 돌로 다시 쌓은 후 이를 기념하고자 세운 비이다. 비는 직사각형으로, 바닥돌 위에 비몸을 세운 간단한 모습이다. 비문에 의하면 성의 둘레는 2,145보(步)이며, 네 개의 문을 만들고 성을 지키기 위한 군량, 전포 등을 갖춘 창고를 두었다. 석성의 공사기간은 6개월이며, 동원된 인원은 78,534명에 달한다. 성이 완성된 뒤에는 여러 장사들을 모아 활쏘기대회를 열어 상을 주었다 한다. 광무 10년(1906)에 성은 헐리게 되었고, 비는 1932년 향교로 옮겨 보존되다가 1980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 <좀 더 알아보기> 영영축성비는 조선 영조 13년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 도호부사였던 민응수(閔應洙)가 임진왜란으로 허물어 없어졌던 대구읍성(당시엔 토성)을 석성(石城)으로 축성하고 난 뒤 그 기념으로 세운 것으로 당시 읍성의 규모와 작업상황이 적혀있다. 성을 쌓고 난 뒤 수성(守城)을 위하여 양향(糧餉), 전포(錢布), 기기(器機) 등을 비치한 수성창(守城倉)을 건립하여 불의의 사태와 훗날의 수성에 대비하였다. 축성이 끝나자 여러 장사들을 모아 활쏘기 대회를 열었고 영남 제일관이라 편액이 걸린 남문에 큰 연회를 열어 각기 공로에 따라 시상하였다. 축성에 대한 행상이 끝나자 선화당에서 성대한 낙성 축연을 베풀었고 이듬해인 1737년 2월 상완일(上浣日)에 영영축성비를 건립한 것이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이다. 원래 이 비가 세워진 곳은 남문 밖 관덕정(觀德亭)터였으나 1906년 박중양이 대구 읍성을 헐면서 그 자리를 도로로 만든 까닭에 구 달성군청(현재 대구백화점 옆) 부근으로 옮겼다가 1932년 향교로 이전하여 보관하다가 1980년 다시 현 위치에 옮겨 보존하게 되었다.}

문의처053-666-2172
대구부수성비

조선 고종 때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해 온 김세호가 대구부성을 수리한 후 그 기념으로 세운 비이다. 대구부성은 영조 때 경상관찰사 민응수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는데 그 후 성이 훼손되어도 제대로 보수가 이루어지지 않던 것을 김세호가 수리한 것이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비문에는 공사에 관한 내용과, 유공자에게 상을 내린 일이 적혀 있다. <좀 더 알아보기> 민응수가 대구읍성을 쌓고 난 뒤에 수성창(蓚城倉)을 부분적으로 수리하였으나 근본적인 수리는 못했다. 그러다가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 도호부사로 부임했던 김세호(金世鎬)가 크게 보수하게 되었다. 그는 부임한 이듬해인 1870년(고종 7년) 봄인 3∼4월 경에 수리를 시작하여 그해 11월에 끝냈다고 수성비에 적고 있다. 또, 수성비 비용이 민간 기부금으로 충당했다는 것으로 보아 수금에 있어서 강제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수성비에 의하면 원래 것보다 높이를 더 높이고 확장한 결과 신축이 97보, 개축이 118보, 보축(補築)이 1,409보, 치첩 신축이 2,608보, 문루 및 공해, 신건(新建)이 72간, 중건이 37간, 중수가 57간 공해 각처의 보수가 256간이었다. 이때 동서남북 대문의 문루를 고쳐짓는 것 외에 성벽 위에 6개의 누각을 세웠다. 또, 모든 누(樓)는 단청을 올리고 치첩은 백회(白灰)로 분장하였으며, 공사가 끝난 뒤 성대한 낙성식도 열고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여 유공자를 포상하였다고 수성비는 적고 있다. 현재 영남 제일관문 앞에 영영축성비(嶺營築城碑)와 함께 서 있는 수성비는 당시 관찰사이던 김세호가 글을 짓고 글씨는 수성을 하면서 책응간역(策應看役)으로 있던 절충장군(折衝將軍) 최석로(崔錫魯)가 쓴 것이다. 원래 이 비석이 세워진 곳은 남문 밖 민응수가 영영축성비를 세운 바로 곁이었으나 이 수성비 역시 1906년 대구 읍성이 헐리면서 갈 곳이 없어졌다가 1932년 현재의 대구 향교 경내로 이전되었으나 다시 영남 제일관문이 중건되면서 만촌동으로 이전했다. 청색 화강석인데 팔작지붕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비부는 황백색 화강석으로 장방형이다.}

문의처053-666-2172
수성랜드

1993년대에 문을 연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유원지 시설이며, 대구 시민의 놀이와 휴식의 대명사인 수성유원지의 핵심 시설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새로운 시설과 최고의 서비스로 고객을 모시고 있으며, 고품격 테마파크로의 발전도 기대하고 있다.}

달서구

수성못유원지

수변 산책과 분수쇼, 야경을 한 자리에서 즐기기 ‣ 둘레 2km의 수성못을 따라 바늘꽃, 연꽃, 갈대 등이 어우러진 수변 데크 로드와 울창한 왕벚나무, 버드나무 가로수길이 펼쳐진다 ‣ 밤에는 물 위에 비친 조명이 물감을 풀어 놓은 듯 아름답게 반짝인다. 하루 4회 영상음악분수가 가동되어 볼거리를 더한다 }

문의처053-761-0645
대구스타디움

2002년 한일월드컵 대회, 2003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으며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유치하고 있다. 또한 주변의 수려한 자연환경과 깨끗한 시설로 주변시민들 뿐만 아니라 타지에서도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대구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체육시설을 개방하여 체력단련 및 휴식공간으로 활용할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체육 및 문화예술 행사를 유치하여 시민들에게 한층 더 가까이 다가 가도록 노력하고 있다.}

모명재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 것이다. 조선에 귀화한 후 계산동 일대에 정착한 두사충은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현 대덕산) 밑으로 집을 옮기고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이라 하였다. 모명재라는 이름도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며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좀 더 알아보기>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것이다. 두사충의 호(號)는 모명(募明)으로 중국의 두릉(杜陵)이 고향이다.1592년 임란이 일어나자 그해 12월 명나라 제독(提督)이던 이여송(李如松)등과 함께 원병을 와서, 주위의 지형을 살펴서 진지에 적합한 장소를 만들도록 터를 잡아주는 임무인 수륙지획(水陸地劃) 주사(主事)를 맡았다. 따라서 그는 이여송의 일급 참모로서 항상 군진(軍陳)¹를 펴는데 조언을 했고, 조선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는 조선군과도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가져왔다. 정유재란 때 두 아들과 함께 원병을 와서 공을 세웠는데 난이 평정되고 난 후, 조선에 귀화하였다. 조선에 귀화한 두사충은 대구에 정착하면서 현재의 중앙공원 일대를 하사 받았는데 경상도 감영을 대구에 옮기자 그 땅을 내어놓고 현재의 계산동(桂山洞) 일대로 두씨들의 거주지를 옮겼다. 그러나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最頂山[현 대덕산])밑으로 거주지를 옮겨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이고 단(壇)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관복을 입고 고국의 천자(天子)를 향해 배례(排禮)를 올렸다고 한다. 그의 사후 자손들은 두사충의 유언에 따라 형제봉(兄第峰)기슭에다 묘소를 쓰게 되었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2월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모명재라고 한 것은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고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백천유수필지동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인데 이 것 또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두사충의 묘소앞에 있는 비문을 별도로 다시 새겨 모명재 앞뜰에 신도비를 세웠다. 이 비문은 이순신 장군의 7대손인 삼남 수군통제 이인수가 지었는데, 임란 당시 이순신과 두사충의 친밀한 관계가 후손들에게 까지 접촉을 갖게 했음을 알 수 있다. 모명재는 네모 반듯한 대지에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앞쪽에 모명재가 위치하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 기와집이다. 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들였으며, 앞쪽에는 반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건물 정면의 여모중방(대청앞 마루바닥에 가로지른 안방)밑은 붉은 벽돌을 쌓아막았다. 가구(架構)는 5량가의 견실한 구조로 종보 위에는 원형 판대공을 세웠으며 앞쪽의 창방(목조건물의 기둥 위에 가로 건너질러 연결하고 평방 또는 화반, 소로 등을 받는 가로재)과 장혀(도리를 받치는 긴나무)을 끼워 장식하였다. 20세기 초 대구지역 재실 건축의 형식을 잘 보여준다.}

문의처053-742-3178
국립대구박물관

대구와 경북 지역 문화유산을 보고 체험하는 알찬 공간 ‣ 박물관 실내의 고대문화실, 중세문화실, 섬유복식실, 기획전시실과 야외의 유물 전시장, 유적공원, 토기가마전시장 등을 돌아보며 대구․경북 지역의 문화유산을 관람 ‣ 암각화 찍어보기, 탁본하기, 문화재 조각 맞추기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

파워클라이밍센터

아슬아슬 짜릿한 스포츠 클라이밍 도전! ‣ 다채로운 난이도와 홀더를 보유한 암장에서 스릴 넘치는 암벽타기 ‣ 우수 클라이머를 꾸준히 배출해 낸 유명 실내암장 ‣ 굵은 땀방울이 비 오듯 떨어지고 손가락은 파르르 떨리지만, 힘겹게 정상에 도달했을 때의 쾌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이용시간 14:00~24:00(월~금요일) 새내기 암벽교실 09:00~17:00 (토, 일 중 하루) 입장료 일반 월 60,000원(3개월 16만원, 6개월 30만원) 학생 월 50,000원(3개월 13만원, 6개월 18만원) 일일 회비 : 8,000원 (암벽화, 쵸크 가루 대여료 2,000원 별도) 쿠폰 10장 : 6,000원, 쿠폰 20장 : 100,000원 매월 새내기 암벽교실 (토, 일 중 하루 9시~17시 수강료 : 30,000원) }

문의처053-743-8850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

신축 야구장에서 쾌적하게 야구 관람하기 ‣ 지하철역과 가까워 접근성이 좋고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야구장 ‣ 8각 다이아몬드 형태로 신축해 관람석의 80%가 그늘이라 쾌적한 야구 관람이 가능. 파티플로어, 잔디석, 커플석, 모래놀이석 등 다양한 이벤트석이 있어 아이와 함께 찾은 가족, 커플 등 입맛에 따라 좌석을 고를 수 있다 }

문의처053-780-3300
영영축성비

임진왜란 때 허물어진 대구토성을 돌로 다시 쌓은 후 이를 기념하고자 세운 비이다. 비는 직사각형으로, 바닥돌 위에 비몸을 세운 간단한 모습이다. 비문에 의하면 성의 둘레는 2,145보(步)이며, 네 개의 문을 만들고 성을 지키기 위한 군량, 전포 등을 갖춘 창고를 두었다. 석성의 공사기간은 6개월이며, 동원된 인원은 78,534명에 달한다. 성이 완성된 뒤에는 여러 장사들을 모아 활쏘기대회를 열어 상을 주었다 한다. 광무 10년(1906)에 성은 헐리게 되었고, 비는 1932년 향교로 옮겨 보존되다가 1980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 <좀 더 알아보기> 영영축성비는 조선 영조 13년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 도호부사였던 민응수(閔應洙)가 임진왜란으로 허물어 없어졌던 대구읍성(당시엔 토성)을 석성(石城)으로 축성하고 난 뒤 그 기념으로 세운 것으로 당시 읍성의 규모와 작업상황이 적혀있다. 성을 쌓고 난 뒤 수성(守城)을 위하여 양향(糧餉), 전포(錢布), 기기(器機) 등을 비치한 수성창(守城倉)을 건립하여 불의의 사태와 훗날의 수성에 대비하였다. 축성이 끝나자 여러 장사들을 모아 활쏘기 대회를 열었고 영남 제일관이라 편액이 걸린 남문에 큰 연회를 열어 각기 공로에 따라 시상하였다. 축성에 대한 행상이 끝나자 선화당에서 성대한 낙성 축연을 베풀었고 이듬해인 1737년 2월 상완일(上浣日)에 영영축성비를 건립한 것이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이다. 원래 이 비가 세워진 곳은 남문 밖 관덕정(觀德亭)터였으나 1906년 박중양이 대구 읍성을 헐면서 그 자리를 도로로 만든 까닭에 구 달성군청(현재 대구백화점 옆) 부근으로 옮겼다가 1932년 향교로 이전하여 보관하다가 1980년 다시 현 위치에 옮겨 보존하게 되었다.}

문의처053-666-2172
대구부수성비

조선 고종 때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해 온 김세호가 대구부성을 수리한 후 그 기념으로 세운 비이다. 대구부성은 영조 때 경상관찰사 민응수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는데 그 후 성이 훼손되어도 제대로 보수가 이루어지지 않던 것을 김세호가 수리한 것이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비문에는 공사에 관한 내용과, 유공자에게 상을 내린 일이 적혀 있다. <좀 더 알아보기> 민응수가 대구읍성을 쌓고 난 뒤에 수성창(蓚城倉)을 부분적으로 수리하였으나 근본적인 수리는 못했다. 그러다가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 도호부사로 부임했던 김세호(金世鎬)가 크게 보수하게 되었다. 그는 부임한 이듬해인 1870년(고종 7년) 봄인 3∼4월 경에 수리를 시작하여 그해 11월에 끝냈다고 수성비에 적고 있다. 또, 수성비 비용이 민간 기부금으로 충당했다는 것으로 보아 수금에 있어서 강제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수성비에 의하면 원래 것보다 높이를 더 높이고 확장한 결과 신축이 97보, 개축이 118보, 보축(補築)이 1,409보, 치첩 신축이 2,608보, 문루 및 공해, 신건(新建)이 72간, 중건이 37간, 중수가 57간 공해 각처의 보수가 256간이었다. 이때 동서남북 대문의 문루를 고쳐짓는 것 외에 성벽 위에 6개의 누각을 세웠다. 또, 모든 누(樓)는 단청을 올리고 치첩은 백회(白灰)로 분장하였으며, 공사가 끝난 뒤 성대한 낙성식도 열고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여 유공자를 포상하였다고 수성비는 적고 있다. 현재 영남 제일관문 앞에 영영축성비(嶺營築城碑)와 함께 서 있는 수성비는 당시 관찰사이던 김세호가 글을 짓고 글씨는 수성을 하면서 책응간역(策應看役)으로 있던 절충장군(折衝將軍) 최석로(崔錫魯)가 쓴 것이다. 원래 이 비석이 세워진 곳은 남문 밖 민응수가 영영축성비를 세운 바로 곁이었으나 이 수성비 역시 1906년 대구 읍성이 헐리면서 갈 곳이 없어졌다가 1932년 현재의 대구 향교 경내로 이전되었으나 다시 영남 제일관문이 중건되면서 만촌동으로 이전했다. 청색 화강석인데 팔작지붕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비부는 황백색 화강석으로 장방형이다.}

문의처053-666-2172
수성랜드

1993년대에 문을 연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유원지 시설이며, 대구 시민의 놀이와 휴식의 대명사인 수성유원지의 핵심 시설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새로운 시설과 최고의 서비스로 고객을 모시고 있으며, 고품격 테마파크로의 발전도 기대하고 있다.}

달성군

수성못유원지

수변 산책과 분수쇼, 야경을 한 자리에서 즐기기 ‣ 둘레 2km의 수성못을 따라 바늘꽃, 연꽃, 갈대 등이 어우러진 수변 데크 로드와 울창한 왕벚나무, 버드나무 가로수길이 펼쳐진다 ‣ 밤에는 물 위에 비친 조명이 물감을 풀어 놓은 듯 아름답게 반짝인다. 하루 4회 영상음악분수가 가동되어 볼거리를 더한다 }

문의처053-761-0645
대구스타디움

2002년 한일월드컵 대회, 2003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으며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유치하고 있다. 또한 주변의 수려한 자연환경과 깨끗한 시설로 주변시민들 뿐만 아니라 타지에서도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대구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체육시설을 개방하여 체력단련 및 휴식공간으로 활용할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체육 및 문화예술 행사를 유치하여 시민들에게 한층 더 가까이 다가 가도록 노력하고 있다.}

모명재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 것이다. 조선에 귀화한 후 계산동 일대에 정착한 두사충은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현 대덕산) 밑으로 집을 옮기고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이라 하였다. 모명재라는 이름도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며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좀 더 알아보기>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것이다. 두사충의 호(號)는 모명(募明)으로 중국의 두릉(杜陵)이 고향이다.1592년 임란이 일어나자 그해 12월 명나라 제독(提督)이던 이여송(李如松)등과 함께 원병을 와서, 주위의 지형을 살펴서 진지에 적합한 장소를 만들도록 터를 잡아주는 임무인 수륙지획(水陸地劃) 주사(主事)를 맡았다. 따라서 그는 이여송의 일급 참모로서 항상 군진(軍陳)¹를 펴는데 조언을 했고, 조선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는 조선군과도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가져왔다. 정유재란 때 두 아들과 함께 원병을 와서 공을 세웠는데 난이 평정되고 난 후, 조선에 귀화하였다. 조선에 귀화한 두사충은 대구에 정착하면서 현재의 중앙공원 일대를 하사 받았는데 경상도 감영을 대구에 옮기자 그 땅을 내어놓고 현재의 계산동(桂山洞) 일대로 두씨들의 거주지를 옮겼다. 그러나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最頂山[현 대덕산])밑으로 거주지를 옮겨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이고 단(壇)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관복을 입고 고국의 천자(天子)를 향해 배례(排禮)를 올렸다고 한다. 그의 사후 자손들은 두사충의 유언에 따라 형제봉(兄第峰)기슭에다 묘소를 쓰게 되었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2월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모명재라고 한 것은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고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백천유수필지동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인데 이 것 또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두사충의 묘소앞에 있는 비문을 별도로 다시 새겨 모명재 앞뜰에 신도비를 세웠다. 이 비문은 이순신 장군의 7대손인 삼남 수군통제 이인수가 지었는데, 임란 당시 이순신과 두사충의 친밀한 관계가 후손들에게 까지 접촉을 갖게 했음을 알 수 있다. 모명재는 네모 반듯한 대지에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앞쪽에 모명재가 위치하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 기와집이다. 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들였으며, 앞쪽에는 반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건물 정면의 여모중방(대청앞 마루바닥에 가로지른 안방)밑은 붉은 벽돌을 쌓아막았다. 가구(架構)는 5량가의 견실한 구조로 종보 위에는 원형 판대공을 세웠으며 앞쪽의 창방(목조건물의 기둥 위에 가로 건너질러 연결하고 평방 또는 화반, 소로 등을 받는 가로재)과 장혀(도리를 받치는 긴나무)을 끼워 장식하였다. 20세기 초 대구지역 재실 건축의 형식을 잘 보여준다.}

문의처053-742-3178
국립대구박물관

대구와 경북 지역 문화유산을 보고 체험하는 알찬 공간 ‣ 박물관 실내의 고대문화실, 중세문화실, 섬유복식실, 기획전시실과 야외의 유물 전시장, 유적공원, 토기가마전시장 등을 돌아보며 대구․경북 지역의 문화유산을 관람 ‣ 암각화 찍어보기, 탁본하기, 문화재 조각 맞추기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

파워클라이밍센터

아슬아슬 짜릿한 스포츠 클라이밍 도전! ‣ 다채로운 난이도와 홀더를 보유한 암장에서 스릴 넘치는 암벽타기 ‣ 우수 클라이머를 꾸준히 배출해 낸 유명 실내암장 ‣ 굵은 땀방울이 비 오듯 떨어지고 손가락은 파르르 떨리지만, 힘겹게 정상에 도달했을 때의 쾌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이용시간 14:00~24:00(월~금요일) 새내기 암벽교실 09:00~17:00 (토, 일 중 하루) 입장료 일반 월 60,000원(3개월 16만원, 6개월 30만원) 학생 월 50,000원(3개월 13만원, 6개월 18만원) 일일 회비 : 8,000원 (암벽화, 쵸크 가루 대여료 2,000원 별도) 쿠폰 10장 : 6,000원, 쿠폰 20장 : 100,000원 매월 새내기 암벽교실 (토, 일 중 하루 9시~17시 수강료 : 30,000원) }

문의처053-743-8850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

신축 야구장에서 쾌적하게 야구 관람하기 ‣ 지하철역과 가까워 접근성이 좋고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야구장 ‣ 8각 다이아몬드 형태로 신축해 관람석의 80%가 그늘이라 쾌적한 야구 관람이 가능. 파티플로어, 잔디석, 커플석, 모래놀이석 등 다양한 이벤트석이 있어 아이와 함께 찾은 가족, 커플 등 입맛에 따라 좌석을 고를 수 있다 }

문의처053-780-3300
영영축성비

임진왜란 때 허물어진 대구토성을 돌로 다시 쌓은 후 이를 기념하고자 세운 비이다. 비는 직사각형으로, 바닥돌 위에 비몸을 세운 간단한 모습이다. 비문에 의하면 성의 둘레는 2,145보(步)이며, 네 개의 문을 만들고 성을 지키기 위한 군량, 전포 등을 갖춘 창고를 두었다. 석성의 공사기간은 6개월이며, 동원된 인원은 78,534명에 달한다. 성이 완성된 뒤에는 여러 장사들을 모아 활쏘기대회를 열어 상을 주었다 한다. 광무 10년(1906)에 성은 헐리게 되었고, 비는 1932년 향교로 옮겨 보존되다가 1980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 <좀 더 알아보기> 영영축성비는 조선 영조 13년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 도호부사였던 민응수(閔應洙)가 임진왜란으로 허물어 없어졌던 대구읍성(당시엔 토성)을 석성(石城)으로 축성하고 난 뒤 그 기념으로 세운 것으로 당시 읍성의 규모와 작업상황이 적혀있다. 성을 쌓고 난 뒤 수성(守城)을 위하여 양향(糧餉), 전포(錢布), 기기(器機) 등을 비치한 수성창(守城倉)을 건립하여 불의의 사태와 훗날의 수성에 대비하였다. 축성이 끝나자 여러 장사들을 모아 활쏘기 대회를 열었고 영남 제일관이라 편액이 걸린 남문에 큰 연회를 열어 각기 공로에 따라 시상하였다. 축성에 대한 행상이 끝나자 선화당에서 성대한 낙성 축연을 베풀었고 이듬해인 1737년 2월 상완일(上浣日)에 영영축성비를 건립한 것이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이다. 원래 이 비가 세워진 곳은 남문 밖 관덕정(觀德亭)터였으나 1906년 박중양이 대구 읍성을 헐면서 그 자리를 도로로 만든 까닭에 구 달성군청(현재 대구백화점 옆) 부근으로 옮겼다가 1932년 향교로 이전하여 보관하다가 1980년 다시 현 위치에 옮겨 보존하게 되었다.}

문의처053-666-2172
대구부수성비

조선 고종 때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해 온 김세호가 대구부성을 수리한 후 그 기념으로 세운 비이다. 대구부성은 영조 때 경상관찰사 민응수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는데 그 후 성이 훼손되어도 제대로 보수가 이루어지지 않던 것을 김세호가 수리한 것이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비문에는 공사에 관한 내용과, 유공자에게 상을 내린 일이 적혀 있다. <좀 더 알아보기> 민응수가 대구읍성을 쌓고 난 뒤에 수성창(蓚城倉)을 부분적으로 수리하였으나 근본적인 수리는 못했다. 그러다가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 도호부사로 부임했던 김세호(金世鎬)가 크게 보수하게 되었다. 그는 부임한 이듬해인 1870년(고종 7년) 봄인 3∼4월 경에 수리를 시작하여 그해 11월에 끝냈다고 수성비에 적고 있다. 또, 수성비 비용이 민간 기부금으로 충당했다는 것으로 보아 수금에 있어서 강제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수성비에 의하면 원래 것보다 높이를 더 높이고 확장한 결과 신축이 97보, 개축이 118보, 보축(補築)이 1,409보, 치첩 신축이 2,608보, 문루 및 공해, 신건(新建)이 72간, 중건이 37간, 중수가 57간 공해 각처의 보수가 256간이었다. 이때 동서남북 대문의 문루를 고쳐짓는 것 외에 성벽 위에 6개의 누각을 세웠다. 또, 모든 누(樓)는 단청을 올리고 치첩은 백회(白灰)로 분장하였으며, 공사가 끝난 뒤 성대한 낙성식도 열고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여 유공자를 포상하였다고 수성비는 적고 있다. 현재 영남 제일관문 앞에 영영축성비(嶺營築城碑)와 함께 서 있는 수성비는 당시 관찰사이던 김세호가 글을 짓고 글씨는 수성을 하면서 책응간역(策應看役)으로 있던 절충장군(折衝將軍) 최석로(崔錫魯)가 쓴 것이다. 원래 이 비석이 세워진 곳은 남문 밖 민응수가 영영축성비를 세운 바로 곁이었으나 이 수성비 역시 1906년 대구 읍성이 헐리면서 갈 곳이 없어졌다가 1932년 현재의 대구 향교 경내로 이전되었으나 다시 영남 제일관문이 중건되면서 만촌동으로 이전했다. 청색 화강석인데 팔작지붕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비부는 황백색 화강석으로 장방형이다.}

문의처053-666-2172
수성랜드

1993년대에 문을 연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유원지 시설이며, 대구 시민의 놀이와 휴식의 대명사인 수성유원지의 핵심 시설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새로운 시설과 최고의 서비스로 고객을 모시고 있으며, 고품격 테마파크로의 발전도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