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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사

수려한 자연과 소중한 문화재를 품은 사찰 ‣ 팔공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신라시대 사찰 ‣ 대웅전, 마애불좌상,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비로암 삼층석탑,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 당간지주 등 경내에 문화유산이 많다 ‣ 전체 높이 33m에 이르는 세계 최대 규모 석조불상인 약사여래대불이 있다 입장료 - 어른 2,500원, 청소년 1,500원, 어린이 1,000원

문의처053-980-7900
이상화고택, 서상돈고택

일제에 항거한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를 만난다 ‣ 이상화 시인은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광복을 위해 저항 정신의 횃불을 밝힌 시를 지었다. 그의 시향이 이상화고택에 남아 있다 ‣ 서상돈은 정부가 일본에 빚을 많이 져 국권을 상실한다고 생각하여 1907년 금연으로 나라의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다

문의처 053-256-3762
대구향교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공자의 가르침이 깃든 배움터 ‣ 조선 건국과 더불어 1398년 지금의 중구 교동에 대구향교 창건 ‣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1932년 지금 자리에 대성전과 동서무, 명륜당 재이건. 1995년 유림회관이 신축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됨.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단아한 건물과 잘 가꿔진 조경 덕분에 조용히 사색하며 거닐기 좋다

문의처053-422-8700
불로동 고분군

팔공산 남쪽 기슭에 펼쳐진 올록볼록 솟은 거대한 고분군 ‣ 삼국시대 형성된 대규모 고분군. 210여 기의 고분이 밀집되어 있다. 한 바퀴 둘러보는 데 약 1시간~1시간 30분 소요된다. 능선이 완만해 아이들도 쉽게 오른다 ‣ 봄, 가을철에는 고분군 사이로 코스모스 등이 피어 한층 아름답고 서정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능선을 따라 올록볼록 솟은 고분군 뒤로 대구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 고분 아래 생태 습지가 조성되어 있어 아이들 학습 공간으로 활용도가 높다

문의처053-662-2363
옻골마을(경주최씨 종가)

문화재청이 선정한 ‘전국 10대 아름다운 돌담길’ ‣ 350년 수령의 회화나무숲을 지나 마을에 들어서면 옛 돌담길을 따라 고택 2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400여 년 이어온 고택을 통해 조선시대 생활양식을 살펴볼 수 있다 ‣ 마을에는 전통체험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마을 해설을 무료로 들을 수 있다

문의처053-983-6407
묘골마을과 육신사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있는 사당이다. 조선 세조 때의 사육신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浮) 등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문의처053-668-3162
도동서원

아름드리 은행나무와 아름다운 토담을 품은 고즈넉한 서원 ‣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 김굉필을 배향한 서원. 1568년 비슬산 동쪽에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지금 자리에 중건 ‣ 조선 중기 서원 건축의 특징을 살필 수 있다. 불필요한 장식 대신 간소함을 추구했으며 서원 입구인 수월루와 강당격인 중정당, 사당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중정당 기단에 여의주와 물고기를 물고 있는 4개의 용머리 조각과 수막새의 장식무늬가 빼어난 토담이 독특하다

문의처053-617-7620
모명재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 것이다. 조선에 귀화한 후 계산동 일대에 정착한 두사충은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현 대덕산) 밑으로 집을 옮기고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이라 하였다. 모명재라는 이름도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며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좀 더 알아보기>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것이다. 두사충의 호(號)는 모명(募明)으로 중국의 두릉(杜陵)이 고향이다.1592년 임란이 일어나자 그해 12월 명나라 제독(提督)이던 이여송(李如松)등과 함께 원병을 와서, 주위의 지형을 살펴서 진지에 적합한 장소를 만들도록 터를 잡아주는 임무인 수륙지획(水陸地劃) 주사(主事)를 맡았다. 따라서 그는 이여송의 일급 참모로서 항상 군진(軍陳)¹를 펴는데 조언을 했고, 조선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는 조선군과도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가져왔다. 정유재란 때 두 아들과 함께 원병을 와서 공을 세웠는데 난이 평정되고 난 후, 조선에 귀화하였다. 조선에 귀화한 두사충은 대구에 정착하면서 현재의 중앙공원 일대를 하사 받았는데 경상도 감영을 대구에 옮기자 그 땅을 내어놓고 현재의 계산동(桂山洞) 일대로 두씨들의 거주지를 옮겼다. 그러나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最頂山[현 대덕산])밑으로 거주지를 옮겨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이고 단(壇)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관복을 입고 고국의 천자(天子)를 향해 배례(排禮)를 올렸다고 한다. 그의 사후 자손들은 두사충의 유언에 따라 형제봉(兄第峰)기슭에다 묘소를 쓰게 되었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2월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모명재라고 한 것은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고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백천유수필지동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인데 이 것 또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두사충의 묘소앞에 있는 비문을 별도로 다시 새겨 모명재 앞뜰에 신도비를 세웠다. 이 비문은 이순신 장군의 7대손인 삼남 수군통제 이인수가 지었는데, 임란 당시 이순신과 두사충의 친밀한 관계가 후손들에게 까지 접촉을 갖게 했음을 알 수 있다. 모명재는 네모 반듯한 대지에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앞쪽에 모명재가 위치하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 기와집이다. 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들였으며, 앞쪽에는 반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건물 정면의 여모중방(대청앞 마루바닥에 가로지른 안방)밑은 붉은 벽돌을 쌓아막았다. 가구(架構)는 5량가의 견실한 구조로 종보 위에는 원형 판대공을 세웠으며 앞쪽의 창방(목조건물의 기둥 위에 가로 건너질러 연결하고 평방 또는 화반, 소로 등을 받는 가로재)과 장혀(도리를 받치는 긴나무)을 끼워 장식하였다. 20세기 초 대구지역 재실 건축의 형식을 잘 보여준다.

문의처053-742-3178
녹동서원

조선으로 귀화한 일본 장수 김충선을 기리는 서원 ‣ 임진왜란 때 귀화한 모하당 김충선을 추모하기 위해 1789년에 건립 ‣ 경내에는 녹동사, 향양문, 유적비, 서원 뒤쪽 삼정산에는 김충선의 묘소가 있다 ‣ 달성한일우호관, 김충선의 귀화 후 활약상을 보여주는 역사관, 체험실 등이 있다

문의처053-767-5790

거리

동화사

수려한 자연과 소중한 문화재를 품은 사찰 ‣ 팔공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신라시대 사찰 ‣ 대웅전, 마애불좌상,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비로암 삼층석탑,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 당간지주 등 경내에 문화유산이 많다 ‣ 전체 높이 33m에 이르는 세계 최대 규모 석조불상인 약사여래대불이 있다 입장료 - 어른 2,500원, 청소년 1,500원, 어린이 1,000원

문의처053-980-7900
이상화고택, 서상돈고택

일제에 항거한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를 만난다 ‣ 이상화 시인은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광복을 위해 저항 정신의 횃불을 밝힌 시를 지었다. 그의 시향이 이상화고택에 남아 있다 ‣ 서상돈은 정부가 일본에 빚을 많이 져 국권을 상실한다고 생각하여 1907년 금연으로 나라의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다

문의처 053-256-3762
대구향교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공자의 가르침이 깃든 배움터 ‣ 조선 건국과 더불어 1398년 지금의 중구 교동에 대구향교 창건 ‣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1932년 지금 자리에 대성전과 동서무, 명륜당 재이건. 1995년 유림회관이 신축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됨.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단아한 건물과 잘 가꿔진 조경 덕분에 조용히 사색하며 거닐기 좋다

문의처053-422-8700
불로동 고분군

팔공산 남쪽 기슭에 펼쳐진 올록볼록 솟은 거대한 고분군 ‣ 삼국시대 형성된 대규모 고분군. 210여 기의 고분이 밀집되어 있다. 한 바퀴 둘러보는 데 약 1시간~1시간 30분 소요된다. 능선이 완만해 아이들도 쉽게 오른다 ‣ 봄, 가을철에는 고분군 사이로 코스모스 등이 피어 한층 아름답고 서정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능선을 따라 올록볼록 솟은 고분군 뒤로 대구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 고분 아래 생태 습지가 조성되어 있어 아이들 학습 공간으로 활용도가 높다

문의처053-662-2363
옻골마을(경주최씨 종가)

문화재청이 선정한 ‘전국 10대 아름다운 돌담길’ ‣ 350년 수령의 회화나무숲을 지나 마을에 들어서면 옛 돌담길을 따라 고택 2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400여 년 이어온 고택을 통해 조선시대 생활양식을 살펴볼 수 있다 ‣ 마을에는 전통체험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마을 해설을 무료로 들을 수 있다

문의처053-983-6407
묘골마을과 육신사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있는 사당이다. 조선 세조 때의 사육신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浮) 등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문의처053-668-3162
도동서원

아름드리 은행나무와 아름다운 토담을 품은 고즈넉한 서원 ‣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 김굉필을 배향한 서원. 1568년 비슬산 동쪽에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지금 자리에 중건 ‣ 조선 중기 서원 건축의 특징을 살필 수 있다. 불필요한 장식 대신 간소함을 추구했으며 서원 입구인 수월루와 강당격인 중정당, 사당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중정당 기단에 여의주와 물고기를 물고 있는 4개의 용머리 조각과 수막새의 장식무늬가 빼어난 토담이 독특하다

문의처053-617-7620
모명재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 것이다. 조선에 귀화한 후 계산동 일대에 정착한 두사충은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현 대덕산) 밑으로 집을 옮기고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이라 하였다. 모명재라는 이름도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며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좀 더 알아보기>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것이다. 두사충의 호(號)는 모명(募明)으로 중국의 두릉(杜陵)이 고향이다.1592년 임란이 일어나자 그해 12월 명나라 제독(提督)이던 이여송(李如松)등과 함께 원병을 와서, 주위의 지형을 살펴서 진지에 적합한 장소를 만들도록 터를 잡아주는 임무인 수륙지획(水陸地劃) 주사(主事)를 맡았다. 따라서 그는 이여송의 일급 참모로서 항상 군진(軍陳)¹를 펴는데 조언을 했고, 조선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는 조선군과도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가져왔다. 정유재란 때 두 아들과 함께 원병을 와서 공을 세웠는데 난이 평정되고 난 후, 조선에 귀화하였다. 조선에 귀화한 두사충은 대구에 정착하면서 현재의 중앙공원 일대를 하사 받았는데 경상도 감영을 대구에 옮기자 그 땅을 내어놓고 현재의 계산동(桂山洞) 일대로 두씨들의 거주지를 옮겼다. 그러나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最頂山[현 대덕산])밑으로 거주지를 옮겨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이고 단(壇)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관복을 입고 고국의 천자(天子)를 향해 배례(排禮)를 올렸다고 한다. 그의 사후 자손들은 두사충의 유언에 따라 형제봉(兄第峰)기슭에다 묘소를 쓰게 되었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2월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모명재라고 한 것은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고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백천유수필지동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인데 이 것 또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두사충의 묘소앞에 있는 비문을 별도로 다시 새겨 모명재 앞뜰에 신도비를 세웠다. 이 비문은 이순신 장군의 7대손인 삼남 수군통제 이인수가 지었는데, 임란 당시 이순신과 두사충의 친밀한 관계가 후손들에게 까지 접촉을 갖게 했음을 알 수 있다. 모명재는 네모 반듯한 대지에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앞쪽에 모명재가 위치하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 기와집이다. 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들였으며, 앞쪽에는 반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건물 정면의 여모중방(대청앞 마루바닥에 가로지른 안방)밑은 붉은 벽돌을 쌓아막았다. 가구(架構)는 5량가의 견실한 구조로 종보 위에는 원형 판대공을 세웠으며 앞쪽의 창방(목조건물의 기둥 위에 가로 건너질러 연결하고 평방 또는 화반, 소로 등을 받는 가로재)과 장혀(도리를 받치는 긴나무)을 끼워 장식하였다. 20세기 초 대구지역 재실 건축의 형식을 잘 보여준다.

문의처053-742-3178
녹동서원

조선으로 귀화한 일본 장수 김충선을 기리는 서원 ‣ 임진왜란 때 귀화한 모하당 김충선을 추모하기 위해 1789년에 건립 ‣ 경내에는 녹동사, 향양문, 유적비, 서원 뒤쪽 삼정산에는 김충선의 묘소가 있다 ‣ 달성한일우호관, 김충선의 귀화 후 활약상을 보여주는 역사관, 체험실 등이 있다

문의처053-767-5790

고택

동화사

수려한 자연과 소중한 문화재를 품은 사찰 ‣ 팔공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신라시대 사찰 ‣ 대웅전, 마애불좌상,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비로암 삼층석탑,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 당간지주 등 경내에 문화유산이 많다 ‣ 전체 높이 33m에 이르는 세계 최대 규모 석조불상인 약사여래대불이 있다 입장료 - 어른 2,500원, 청소년 1,500원, 어린이 1,000원

문의처053-980-7900
이상화고택, 서상돈고택

일제에 항거한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를 만난다 ‣ 이상화 시인은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광복을 위해 저항 정신의 횃불을 밝힌 시를 지었다. 그의 시향이 이상화고택에 남아 있다 ‣ 서상돈은 정부가 일본에 빚을 많이 져 국권을 상실한다고 생각하여 1907년 금연으로 나라의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다

문의처 053-256-3762
대구향교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공자의 가르침이 깃든 배움터 ‣ 조선 건국과 더불어 1398년 지금의 중구 교동에 대구향교 창건 ‣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1932년 지금 자리에 대성전과 동서무, 명륜당 재이건. 1995년 유림회관이 신축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됨.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단아한 건물과 잘 가꿔진 조경 덕분에 조용히 사색하며 거닐기 좋다

문의처053-422-8700
불로동 고분군

팔공산 남쪽 기슭에 펼쳐진 올록볼록 솟은 거대한 고분군 ‣ 삼국시대 형성된 대규모 고분군. 210여 기의 고분이 밀집되어 있다. 한 바퀴 둘러보는 데 약 1시간~1시간 30분 소요된다. 능선이 완만해 아이들도 쉽게 오른다 ‣ 봄, 가을철에는 고분군 사이로 코스모스 등이 피어 한층 아름답고 서정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능선을 따라 올록볼록 솟은 고분군 뒤로 대구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 고분 아래 생태 습지가 조성되어 있어 아이들 학습 공간으로 활용도가 높다

문의처053-662-2363
옻골마을(경주최씨 종가)

문화재청이 선정한 ‘전국 10대 아름다운 돌담길’ ‣ 350년 수령의 회화나무숲을 지나 마을에 들어서면 옛 돌담길을 따라 고택 2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400여 년 이어온 고택을 통해 조선시대 생활양식을 살펴볼 수 있다 ‣ 마을에는 전통체험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마을 해설을 무료로 들을 수 있다

문의처053-983-6407
묘골마을과 육신사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있는 사당이다. 조선 세조 때의 사육신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浮) 등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문의처053-668-3162
도동서원

아름드리 은행나무와 아름다운 토담을 품은 고즈넉한 서원 ‣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 김굉필을 배향한 서원. 1568년 비슬산 동쪽에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지금 자리에 중건 ‣ 조선 중기 서원 건축의 특징을 살필 수 있다. 불필요한 장식 대신 간소함을 추구했으며 서원 입구인 수월루와 강당격인 중정당, 사당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중정당 기단에 여의주와 물고기를 물고 있는 4개의 용머리 조각과 수막새의 장식무늬가 빼어난 토담이 독특하다

문의처053-617-7620
모명재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 것이다. 조선에 귀화한 후 계산동 일대에 정착한 두사충은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현 대덕산) 밑으로 집을 옮기고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이라 하였다. 모명재라는 이름도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며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좀 더 알아보기>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것이다. 두사충의 호(號)는 모명(募明)으로 중국의 두릉(杜陵)이 고향이다.1592년 임란이 일어나자 그해 12월 명나라 제독(提督)이던 이여송(李如松)등과 함께 원병을 와서, 주위의 지형을 살펴서 진지에 적합한 장소를 만들도록 터를 잡아주는 임무인 수륙지획(水陸地劃) 주사(主事)를 맡았다. 따라서 그는 이여송의 일급 참모로서 항상 군진(軍陳)¹를 펴는데 조언을 했고, 조선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는 조선군과도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가져왔다. 정유재란 때 두 아들과 함께 원병을 와서 공을 세웠는데 난이 평정되고 난 후, 조선에 귀화하였다. 조선에 귀화한 두사충은 대구에 정착하면서 현재의 중앙공원 일대를 하사 받았는데 경상도 감영을 대구에 옮기자 그 땅을 내어놓고 현재의 계산동(桂山洞) 일대로 두씨들의 거주지를 옮겼다. 그러나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最頂山[현 대덕산])밑으로 거주지를 옮겨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이고 단(壇)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관복을 입고 고국의 천자(天子)를 향해 배례(排禮)를 올렸다고 한다. 그의 사후 자손들은 두사충의 유언에 따라 형제봉(兄第峰)기슭에다 묘소를 쓰게 되었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2월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모명재라고 한 것은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고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백천유수필지동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인데 이 것 또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두사충의 묘소앞에 있는 비문을 별도로 다시 새겨 모명재 앞뜰에 신도비를 세웠다. 이 비문은 이순신 장군의 7대손인 삼남 수군통제 이인수가 지었는데, 임란 당시 이순신과 두사충의 친밀한 관계가 후손들에게 까지 접촉을 갖게 했음을 알 수 있다. 모명재는 네모 반듯한 대지에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앞쪽에 모명재가 위치하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 기와집이다. 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들였으며, 앞쪽에는 반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건물 정면의 여모중방(대청앞 마루바닥에 가로지른 안방)밑은 붉은 벽돌을 쌓아막았다. 가구(架構)는 5량가의 견실한 구조로 종보 위에는 원형 판대공을 세웠으며 앞쪽의 창방(목조건물의 기둥 위에 가로 건너질러 연결하고 평방 또는 화반, 소로 등을 받는 가로재)과 장혀(도리를 받치는 긴나무)을 끼워 장식하였다. 20세기 초 대구지역 재실 건축의 형식을 잘 보여준다.

문의처053-742-3178
녹동서원

조선으로 귀화한 일본 장수 김충선을 기리는 서원 ‣ 임진왜란 때 귀화한 모하당 김충선을 추모하기 위해 1789년에 건립 ‣ 경내에는 녹동사, 향양문, 유적비, 서원 뒤쪽 삼정산에는 김충선의 묘소가 있다 ‣ 달성한일우호관, 김충선의 귀화 후 활약상을 보여주는 역사관, 체험실 등이 있다

문의처053-767-5790

골목

동화사

수려한 자연과 소중한 문화재를 품은 사찰 ‣ 팔공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신라시대 사찰 ‣ 대웅전, 마애불좌상,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비로암 삼층석탑,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 당간지주 등 경내에 문화유산이 많다 ‣ 전체 높이 33m에 이르는 세계 최대 규모 석조불상인 약사여래대불이 있다 입장료 - 어른 2,500원, 청소년 1,500원, 어린이 1,000원

문의처053-980-7900
이상화고택, 서상돈고택

일제에 항거한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를 만난다 ‣ 이상화 시인은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광복을 위해 저항 정신의 횃불을 밝힌 시를 지었다. 그의 시향이 이상화고택에 남아 있다 ‣ 서상돈은 정부가 일본에 빚을 많이 져 국권을 상실한다고 생각하여 1907년 금연으로 나라의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다

문의처 053-256-3762
대구향교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공자의 가르침이 깃든 배움터 ‣ 조선 건국과 더불어 1398년 지금의 중구 교동에 대구향교 창건 ‣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1932년 지금 자리에 대성전과 동서무, 명륜당 재이건. 1995년 유림회관이 신축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됨.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단아한 건물과 잘 가꿔진 조경 덕분에 조용히 사색하며 거닐기 좋다

문의처053-422-8700
불로동 고분군

팔공산 남쪽 기슭에 펼쳐진 올록볼록 솟은 거대한 고분군 ‣ 삼국시대 형성된 대규모 고분군. 210여 기의 고분이 밀집되어 있다. 한 바퀴 둘러보는 데 약 1시간~1시간 30분 소요된다. 능선이 완만해 아이들도 쉽게 오른다 ‣ 봄, 가을철에는 고분군 사이로 코스모스 등이 피어 한층 아름답고 서정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능선을 따라 올록볼록 솟은 고분군 뒤로 대구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 고분 아래 생태 습지가 조성되어 있어 아이들 학습 공간으로 활용도가 높다

문의처053-662-2363
옻골마을(경주최씨 종가)

문화재청이 선정한 ‘전국 10대 아름다운 돌담길’ ‣ 350년 수령의 회화나무숲을 지나 마을에 들어서면 옛 돌담길을 따라 고택 2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400여 년 이어온 고택을 통해 조선시대 생활양식을 살펴볼 수 있다 ‣ 마을에는 전통체험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마을 해설을 무료로 들을 수 있다

문의처053-983-6407
묘골마을과 육신사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있는 사당이다. 조선 세조 때의 사육신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浮) 등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문의처053-668-3162
도동서원

아름드리 은행나무와 아름다운 토담을 품은 고즈넉한 서원 ‣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 김굉필을 배향한 서원. 1568년 비슬산 동쪽에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지금 자리에 중건 ‣ 조선 중기 서원 건축의 특징을 살필 수 있다. 불필요한 장식 대신 간소함을 추구했으며 서원 입구인 수월루와 강당격인 중정당, 사당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중정당 기단에 여의주와 물고기를 물고 있는 4개의 용머리 조각과 수막새의 장식무늬가 빼어난 토담이 독특하다

문의처053-617-7620
모명재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 것이다. 조선에 귀화한 후 계산동 일대에 정착한 두사충은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현 대덕산) 밑으로 집을 옮기고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이라 하였다. 모명재라는 이름도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며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좀 더 알아보기>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것이다. 두사충의 호(號)는 모명(募明)으로 중국의 두릉(杜陵)이 고향이다.1592년 임란이 일어나자 그해 12월 명나라 제독(提督)이던 이여송(李如松)등과 함께 원병을 와서, 주위의 지형을 살펴서 진지에 적합한 장소를 만들도록 터를 잡아주는 임무인 수륙지획(水陸地劃) 주사(主事)를 맡았다. 따라서 그는 이여송의 일급 참모로서 항상 군진(軍陳)¹를 펴는데 조언을 했고, 조선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는 조선군과도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가져왔다. 정유재란 때 두 아들과 함께 원병을 와서 공을 세웠는데 난이 평정되고 난 후, 조선에 귀화하였다. 조선에 귀화한 두사충은 대구에 정착하면서 현재의 중앙공원 일대를 하사 받았는데 경상도 감영을 대구에 옮기자 그 땅을 내어놓고 현재의 계산동(桂山洞) 일대로 두씨들의 거주지를 옮겼다. 그러나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最頂山[현 대덕산])밑으로 거주지를 옮겨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이고 단(壇)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관복을 입고 고국의 천자(天子)를 향해 배례(排禮)를 올렸다고 한다. 그의 사후 자손들은 두사충의 유언에 따라 형제봉(兄第峰)기슭에다 묘소를 쓰게 되었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2월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모명재라고 한 것은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고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백천유수필지동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인데 이 것 또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두사충의 묘소앞에 있는 비문을 별도로 다시 새겨 모명재 앞뜰에 신도비를 세웠다. 이 비문은 이순신 장군의 7대손인 삼남 수군통제 이인수가 지었는데, 임란 당시 이순신과 두사충의 친밀한 관계가 후손들에게 까지 접촉을 갖게 했음을 알 수 있다. 모명재는 네모 반듯한 대지에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앞쪽에 모명재가 위치하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 기와집이다. 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들였으며, 앞쪽에는 반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건물 정면의 여모중방(대청앞 마루바닥에 가로지른 안방)밑은 붉은 벽돌을 쌓아막았다. 가구(架構)는 5량가의 견실한 구조로 종보 위에는 원형 판대공을 세웠으며 앞쪽의 창방(목조건물의 기둥 위에 가로 건너질러 연결하고 평방 또는 화반, 소로 등을 받는 가로재)과 장혀(도리를 받치는 긴나무)을 끼워 장식하였다. 20세기 초 대구지역 재실 건축의 형식을 잘 보여준다.

문의처053-742-3178
녹동서원

조선으로 귀화한 일본 장수 김충선을 기리는 서원 ‣ 임진왜란 때 귀화한 모하당 김충선을 추모하기 위해 1789년에 건립 ‣ 경내에는 녹동사, 향양문, 유적비, 서원 뒤쪽 삼정산에는 김충선의 묘소가 있다 ‣ 달성한일우호관, 김충선의 귀화 후 활약상을 보여주는 역사관, 체험실 등이 있다

문의처053-767-5790

공원

동화사

수려한 자연과 소중한 문화재를 품은 사찰 ‣ 팔공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신라시대 사찰 ‣ 대웅전, 마애불좌상,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비로암 삼층석탑,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 당간지주 등 경내에 문화유산이 많다 ‣ 전체 높이 33m에 이르는 세계 최대 규모 석조불상인 약사여래대불이 있다 입장료 - 어른 2,500원, 청소년 1,500원, 어린이 1,000원

문의처053-980-7900
이상화고택, 서상돈고택

일제에 항거한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를 만난다 ‣ 이상화 시인은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광복을 위해 저항 정신의 횃불을 밝힌 시를 지었다. 그의 시향이 이상화고택에 남아 있다 ‣ 서상돈은 정부가 일본에 빚을 많이 져 국권을 상실한다고 생각하여 1907년 금연으로 나라의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다

문의처 053-256-3762
대구향교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공자의 가르침이 깃든 배움터 ‣ 조선 건국과 더불어 1398년 지금의 중구 교동에 대구향교 창건 ‣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1932년 지금 자리에 대성전과 동서무, 명륜당 재이건. 1995년 유림회관이 신축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됨.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단아한 건물과 잘 가꿔진 조경 덕분에 조용히 사색하며 거닐기 좋다

문의처053-422-8700
불로동 고분군

팔공산 남쪽 기슭에 펼쳐진 올록볼록 솟은 거대한 고분군 ‣ 삼국시대 형성된 대규모 고분군. 210여 기의 고분이 밀집되어 있다. 한 바퀴 둘러보는 데 약 1시간~1시간 30분 소요된다. 능선이 완만해 아이들도 쉽게 오른다 ‣ 봄, 가을철에는 고분군 사이로 코스모스 등이 피어 한층 아름답고 서정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능선을 따라 올록볼록 솟은 고분군 뒤로 대구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 고분 아래 생태 습지가 조성되어 있어 아이들 학습 공간으로 활용도가 높다

문의처053-662-2363
옻골마을(경주최씨 종가)

문화재청이 선정한 ‘전국 10대 아름다운 돌담길’ ‣ 350년 수령의 회화나무숲을 지나 마을에 들어서면 옛 돌담길을 따라 고택 2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400여 년 이어온 고택을 통해 조선시대 생활양식을 살펴볼 수 있다 ‣ 마을에는 전통체험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마을 해설을 무료로 들을 수 있다

문의처053-983-6407
묘골마을과 육신사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있는 사당이다. 조선 세조 때의 사육신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浮) 등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문의처053-668-3162
도동서원

아름드리 은행나무와 아름다운 토담을 품은 고즈넉한 서원 ‣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 김굉필을 배향한 서원. 1568년 비슬산 동쪽에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지금 자리에 중건 ‣ 조선 중기 서원 건축의 특징을 살필 수 있다. 불필요한 장식 대신 간소함을 추구했으며 서원 입구인 수월루와 강당격인 중정당, 사당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중정당 기단에 여의주와 물고기를 물고 있는 4개의 용머리 조각과 수막새의 장식무늬가 빼어난 토담이 독특하다

문의처053-617-7620
모명재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 것이다. 조선에 귀화한 후 계산동 일대에 정착한 두사충은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현 대덕산) 밑으로 집을 옮기고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이라 하였다. 모명재라는 이름도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며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좀 더 알아보기>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것이다. 두사충의 호(號)는 모명(募明)으로 중국의 두릉(杜陵)이 고향이다.1592년 임란이 일어나자 그해 12월 명나라 제독(提督)이던 이여송(李如松)등과 함께 원병을 와서, 주위의 지형을 살펴서 진지에 적합한 장소를 만들도록 터를 잡아주는 임무인 수륙지획(水陸地劃) 주사(主事)를 맡았다. 따라서 그는 이여송의 일급 참모로서 항상 군진(軍陳)¹를 펴는데 조언을 했고, 조선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는 조선군과도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가져왔다. 정유재란 때 두 아들과 함께 원병을 와서 공을 세웠는데 난이 평정되고 난 후, 조선에 귀화하였다. 조선에 귀화한 두사충은 대구에 정착하면서 현재의 중앙공원 일대를 하사 받았는데 경상도 감영을 대구에 옮기자 그 땅을 내어놓고 현재의 계산동(桂山洞) 일대로 두씨들의 거주지를 옮겼다. 그러나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最頂山[현 대덕산])밑으로 거주지를 옮겨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이고 단(壇)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관복을 입고 고국의 천자(天子)를 향해 배례(排禮)를 올렸다고 한다. 그의 사후 자손들은 두사충의 유언에 따라 형제봉(兄第峰)기슭에다 묘소를 쓰게 되었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2월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모명재라고 한 것은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고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백천유수필지동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인데 이 것 또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두사충의 묘소앞에 있는 비문을 별도로 다시 새겨 모명재 앞뜰에 신도비를 세웠다. 이 비문은 이순신 장군의 7대손인 삼남 수군통제 이인수가 지었는데, 임란 당시 이순신과 두사충의 친밀한 관계가 후손들에게 까지 접촉을 갖게 했음을 알 수 있다. 모명재는 네모 반듯한 대지에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앞쪽에 모명재가 위치하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 기와집이다. 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들였으며, 앞쪽에는 반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건물 정면의 여모중방(대청앞 마루바닥에 가로지른 안방)밑은 붉은 벽돌을 쌓아막았다. 가구(架構)는 5량가의 견실한 구조로 종보 위에는 원형 판대공을 세웠으며 앞쪽의 창방(목조건물의 기둥 위에 가로 건너질러 연결하고 평방 또는 화반, 소로 등을 받는 가로재)과 장혀(도리를 받치는 긴나무)을 끼워 장식하였다. 20세기 초 대구지역 재실 건축의 형식을 잘 보여준다.

문의처053-742-3178
녹동서원

조선으로 귀화한 일본 장수 김충선을 기리는 서원 ‣ 임진왜란 때 귀화한 모하당 김충선을 추모하기 위해 1789년에 건립 ‣ 경내에는 녹동사, 향양문, 유적비, 서원 뒤쪽 삼정산에는 김충선의 묘소가 있다 ‣ 달성한일우호관, 김충선의 귀화 후 활약상을 보여주는 역사관, 체험실 등이 있다

문의처053-767-5790

극장

동화사

수려한 자연과 소중한 문화재를 품은 사찰 ‣ 팔공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신라시대 사찰 ‣ 대웅전, 마애불좌상,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비로암 삼층석탑,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 당간지주 등 경내에 문화유산이 많다 ‣ 전체 높이 33m에 이르는 세계 최대 규모 석조불상인 약사여래대불이 있다 입장료 - 어른 2,500원, 청소년 1,500원, 어린이 1,000원

문의처053-980-7900
이상화고택, 서상돈고택

일제에 항거한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를 만난다 ‣ 이상화 시인은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광복을 위해 저항 정신의 횃불을 밝힌 시를 지었다. 그의 시향이 이상화고택에 남아 있다 ‣ 서상돈은 정부가 일본에 빚을 많이 져 국권을 상실한다고 생각하여 1907년 금연으로 나라의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다

문의처 053-256-3762
대구향교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공자의 가르침이 깃든 배움터 ‣ 조선 건국과 더불어 1398년 지금의 중구 교동에 대구향교 창건 ‣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1932년 지금 자리에 대성전과 동서무, 명륜당 재이건. 1995년 유림회관이 신축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됨.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단아한 건물과 잘 가꿔진 조경 덕분에 조용히 사색하며 거닐기 좋다

문의처053-422-8700
불로동 고분군

팔공산 남쪽 기슭에 펼쳐진 올록볼록 솟은 거대한 고분군 ‣ 삼국시대 형성된 대규모 고분군. 210여 기의 고분이 밀집되어 있다. 한 바퀴 둘러보는 데 약 1시간~1시간 30분 소요된다. 능선이 완만해 아이들도 쉽게 오른다 ‣ 봄, 가을철에는 고분군 사이로 코스모스 등이 피어 한층 아름답고 서정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능선을 따라 올록볼록 솟은 고분군 뒤로 대구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 고분 아래 생태 습지가 조성되어 있어 아이들 학습 공간으로 활용도가 높다

문의처053-662-2363
옻골마을(경주최씨 종가)

문화재청이 선정한 ‘전국 10대 아름다운 돌담길’ ‣ 350년 수령의 회화나무숲을 지나 마을에 들어서면 옛 돌담길을 따라 고택 2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400여 년 이어온 고택을 통해 조선시대 생활양식을 살펴볼 수 있다 ‣ 마을에는 전통체험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마을 해설을 무료로 들을 수 있다

문의처053-983-6407
묘골마을과 육신사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있는 사당이다. 조선 세조 때의 사육신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浮) 등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문의처053-668-3162
도동서원

아름드리 은행나무와 아름다운 토담을 품은 고즈넉한 서원 ‣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 김굉필을 배향한 서원. 1568년 비슬산 동쪽에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지금 자리에 중건 ‣ 조선 중기 서원 건축의 특징을 살필 수 있다. 불필요한 장식 대신 간소함을 추구했으며 서원 입구인 수월루와 강당격인 중정당, 사당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중정당 기단에 여의주와 물고기를 물고 있는 4개의 용머리 조각과 수막새의 장식무늬가 빼어난 토담이 독특하다

문의처053-617-7620
모명재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 것이다. 조선에 귀화한 후 계산동 일대에 정착한 두사충은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현 대덕산) 밑으로 집을 옮기고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이라 하였다. 모명재라는 이름도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며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좀 더 알아보기>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것이다. 두사충의 호(號)는 모명(募明)으로 중국의 두릉(杜陵)이 고향이다.1592년 임란이 일어나자 그해 12월 명나라 제독(提督)이던 이여송(李如松)등과 함께 원병을 와서, 주위의 지형을 살펴서 진지에 적합한 장소를 만들도록 터를 잡아주는 임무인 수륙지획(水陸地劃) 주사(主事)를 맡았다. 따라서 그는 이여송의 일급 참모로서 항상 군진(軍陳)¹를 펴는데 조언을 했고, 조선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는 조선군과도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가져왔다. 정유재란 때 두 아들과 함께 원병을 와서 공을 세웠는데 난이 평정되고 난 후, 조선에 귀화하였다. 조선에 귀화한 두사충은 대구에 정착하면서 현재의 중앙공원 일대를 하사 받았는데 경상도 감영을 대구에 옮기자 그 땅을 내어놓고 현재의 계산동(桂山洞) 일대로 두씨들의 거주지를 옮겼다. 그러나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最頂山[현 대덕산])밑으로 거주지를 옮겨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이고 단(壇)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관복을 입고 고국의 천자(天子)를 향해 배례(排禮)를 올렸다고 한다. 그의 사후 자손들은 두사충의 유언에 따라 형제봉(兄第峰)기슭에다 묘소를 쓰게 되었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2월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모명재라고 한 것은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고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백천유수필지동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인데 이 것 또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두사충의 묘소앞에 있는 비문을 별도로 다시 새겨 모명재 앞뜰에 신도비를 세웠다. 이 비문은 이순신 장군의 7대손인 삼남 수군통제 이인수가 지었는데, 임란 당시 이순신과 두사충의 친밀한 관계가 후손들에게 까지 접촉을 갖게 했음을 알 수 있다. 모명재는 네모 반듯한 대지에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앞쪽에 모명재가 위치하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 기와집이다. 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들였으며, 앞쪽에는 반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건물 정면의 여모중방(대청앞 마루바닥에 가로지른 안방)밑은 붉은 벽돌을 쌓아막았다. 가구(架構)는 5량가의 견실한 구조로 종보 위에는 원형 판대공을 세웠으며 앞쪽의 창방(목조건물의 기둥 위에 가로 건너질러 연결하고 평방 또는 화반, 소로 등을 받는 가로재)과 장혀(도리를 받치는 긴나무)을 끼워 장식하였다. 20세기 초 대구지역 재실 건축의 형식을 잘 보여준다.

문의처053-742-3178
녹동서원

조선으로 귀화한 일본 장수 김충선을 기리는 서원 ‣ 임진왜란 때 귀화한 모하당 김충선을 추모하기 위해 1789년에 건립 ‣ 경내에는 녹동사, 향양문, 유적비, 서원 뒤쪽 삼정산에는 김충선의 묘소가 있다 ‣ 달성한일우호관, 김충선의 귀화 후 활약상을 보여주는 역사관, 체험실 등이 있다

문의처053-767-5790

기념관

동화사

수려한 자연과 소중한 문화재를 품은 사찰 ‣ 팔공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신라시대 사찰 ‣ 대웅전, 마애불좌상,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비로암 삼층석탑,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 당간지주 등 경내에 문화유산이 많다 ‣ 전체 높이 33m에 이르는 세계 최대 규모 석조불상인 약사여래대불이 있다 입장료 - 어른 2,500원, 청소년 1,500원, 어린이 1,000원

문의처053-980-7900
이상화고택, 서상돈고택

일제에 항거한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를 만난다 ‣ 이상화 시인은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광복을 위해 저항 정신의 횃불을 밝힌 시를 지었다. 그의 시향이 이상화고택에 남아 있다 ‣ 서상돈은 정부가 일본에 빚을 많이 져 국권을 상실한다고 생각하여 1907년 금연으로 나라의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다

문의처 053-256-3762
대구향교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공자의 가르침이 깃든 배움터 ‣ 조선 건국과 더불어 1398년 지금의 중구 교동에 대구향교 창건 ‣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1932년 지금 자리에 대성전과 동서무, 명륜당 재이건. 1995년 유림회관이 신축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됨.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단아한 건물과 잘 가꿔진 조경 덕분에 조용히 사색하며 거닐기 좋다

문의처053-422-8700
불로동 고분군

팔공산 남쪽 기슭에 펼쳐진 올록볼록 솟은 거대한 고분군 ‣ 삼국시대 형성된 대규모 고분군. 210여 기의 고분이 밀집되어 있다. 한 바퀴 둘러보는 데 약 1시간~1시간 30분 소요된다. 능선이 완만해 아이들도 쉽게 오른다 ‣ 봄, 가을철에는 고분군 사이로 코스모스 등이 피어 한층 아름답고 서정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능선을 따라 올록볼록 솟은 고분군 뒤로 대구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 고분 아래 생태 습지가 조성되어 있어 아이들 학습 공간으로 활용도가 높다

문의처053-662-2363
옻골마을(경주최씨 종가)

문화재청이 선정한 ‘전국 10대 아름다운 돌담길’ ‣ 350년 수령의 회화나무숲을 지나 마을에 들어서면 옛 돌담길을 따라 고택 2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400여 년 이어온 고택을 통해 조선시대 생활양식을 살펴볼 수 있다 ‣ 마을에는 전통체험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마을 해설을 무료로 들을 수 있다

문의처053-983-6407
묘골마을과 육신사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있는 사당이다. 조선 세조 때의 사육신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浮) 등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문의처053-668-3162
도동서원

아름드리 은행나무와 아름다운 토담을 품은 고즈넉한 서원 ‣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 김굉필을 배향한 서원. 1568년 비슬산 동쪽에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지금 자리에 중건 ‣ 조선 중기 서원 건축의 특징을 살필 수 있다. 불필요한 장식 대신 간소함을 추구했으며 서원 입구인 수월루와 강당격인 중정당, 사당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중정당 기단에 여의주와 물고기를 물고 있는 4개의 용머리 조각과 수막새의 장식무늬가 빼어난 토담이 독특하다

문의처053-617-7620
모명재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 것이다. 조선에 귀화한 후 계산동 일대에 정착한 두사충은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현 대덕산) 밑으로 집을 옮기고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이라 하였다. 모명재라는 이름도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며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좀 더 알아보기>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것이다. 두사충의 호(號)는 모명(募明)으로 중국의 두릉(杜陵)이 고향이다.1592년 임란이 일어나자 그해 12월 명나라 제독(提督)이던 이여송(李如松)등과 함께 원병을 와서, 주위의 지형을 살펴서 진지에 적합한 장소를 만들도록 터를 잡아주는 임무인 수륙지획(水陸地劃) 주사(主事)를 맡았다. 따라서 그는 이여송의 일급 참모로서 항상 군진(軍陳)¹를 펴는데 조언을 했고, 조선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는 조선군과도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가져왔다. 정유재란 때 두 아들과 함께 원병을 와서 공을 세웠는데 난이 평정되고 난 후, 조선에 귀화하였다. 조선에 귀화한 두사충은 대구에 정착하면서 현재의 중앙공원 일대를 하사 받았는데 경상도 감영을 대구에 옮기자 그 땅을 내어놓고 현재의 계산동(桂山洞) 일대로 두씨들의 거주지를 옮겼다. 그러나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最頂山[현 대덕산])밑으로 거주지를 옮겨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이고 단(壇)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관복을 입고 고국의 천자(天子)를 향해 배례(排禮)를 올렸다고 한다. 그의 사후 자손들은 두사충의 유언에 따라 형제봉(兄第峰)기슭에다 묘소를 쓰게 되었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2월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모명재라고 한 것은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고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백천유수필지동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인데 이 것 또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두사충의 묘소앞에 있는 비문을 별도로 다시 새겨 모명재 앞뜰에 신도비를 세웠다. 이 비문은 이순신 장군의 7대손인 삼남 수군통제 이인수가 지었는데, 임란 당시 이순신과 두사충의 친밀한 관계가 후손들에게 까지 접촉을 갖게 했음을 알 수 있다. 모명재는 네모 반듯한 대지에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앞쪽에 모명재가 위치하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 기와집이다. 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들였으며, 앞쪽에는 반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건물 정면의 여모중방(대청앞 마루바닥에 가로지른 안방)밑은 붉은 벽돌을 쌓아막았다. 가구(架構)는 5량가의 견실한 구조로 종보 위에는 원형 판대공을 세웠으며 앞쪽의 창방(목조건물의 기둥 위에 가로 건너질러 연결하고 평방 또는 화반, 소로 등을 받는 가로재)과 장혀(도리를 받치는 긴나무)을 끼워 장식하였다. 20세기 초 대구지역 재실 건축의 형식을 잘 보여준다.

문의처053-742-3178
녹동서원

조선으로 귀화한 일본 장수 김충선을 기리는 서원 ‣ 임진왜란 때 귀화한 모하당 김충선을 추모하기 위해 1789년에 건립 ‣ 경내에는 녹동사, 향양문, 유적비, 서원 뒤쪽 삼정산에는 김충선의 묘소가 있다 ‣ 달성한일우호관, 김충선의 귀화 후 활약상을 보여주는 역사관, 체험실 등이 있다

문의처053-767-5790

레포츠

동화사

수려한 자연과 소중한 문화재를 품은 사찰 ‣ 팔공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신라시대 사찰 ‣ 대웅전, 마애불좌상,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비로암 삼층석탑,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 당간지주 등 경내에 문화유산이 많다 ‣ 전체 높이 33m에 이르는 세계 최대 규모 석조불상인 약사여래대불이 있다 입장료 - 어른 2,500원, 청소년 1,500원, 어린이 1,000원

문의처053-980-7900
이상화고택, 서상돈고택

일제에 항거한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를 만난다 ‣ 이상화 시인은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광복을 위해 저항 정신의 횃불을 밝힌 시를 지었다. 그의 시향이 이상화고택에 남아 있다 ‣ 서상돈은 정부가 일본에 빚을 많이 져 국권을 상실한다고 생각하여 1907년 금연으로 나라의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다

문의처 053-256-3762
대구향교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공자의 가르침이 깃든 배움터 ‣ 조선 건국과 더불어 1398년 지금의 중구 교동에 대구향교 창건 ‣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1932년 지금 자리에 대성전과 동서무, 명륜당 재이건. 1995년 유림회관이 신축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됨.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단아한 건물과 잘 가꿔진 조경 덕분에 조용히 사색하며 거닐기 좋다

문의처053-422-8700
불로동 고분군

팔공산 남쪽 기슭에 펼쳐진 올록볼록 솟은 거대한 고분군 ‣ 삼국시대 형성된 대규모 고분군. 210여 기의 고분이 밀집되어 있다. 한 바퀴 둘러보는 데 약 1시간~1시간 30분 소요된다. 능선이 완만해 아이들도 쉽게 오른다 ‣ 봄, 가을철에는 고분군 사이로 코스모스 등이 피어 한층 아름답고 서정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능선을 따라 올록볼록 솟은 고분군 뒤로 대구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 고분 아래 생태 습지가 조성되어 있어 아이들 학습 공간으로 활용도가 높다

문의처053-662-2363
옻골마을(경주최씨 종가)

문화재청이 선정한 ‘전국 10대 아름다운 돌담길’ ‣ 350년 수령의 회화나무숲을 지나 마을에 들어서면 옛 돌담길을 따라 고택 2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400여 년 이어온 고택을 통해 조선시대 생활양식을 살펴볼 수 있다 ‣ 마을에는 전통체험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마을 해설을 무료로 들을 수 있다

문의처053-983-6407
묘골마을과 육신사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있는 사당이다. 조선 세조 때의 사육신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浮) 등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문의처053-668-3162
도동서원

아름드리 은행나무와 아름다운 토담을 품은 고즈넉한 서원 ‣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 김굉필을 배향한 서원. 1568년 비슬산 동쪽에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지금 자리에 중건 ‣ 조선 중기 서원 건축의 특징을 살필 수 있다. 불필요한 장식 대신 간소함을 추구했으며 서원 입구인 수월루와 강당격인 중정당, 사당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중정당 기단에 여의주와 물고기를 물고 있는 4개의 용머리 조각과 수막새의 장식무늬가 빼어난 토담이 독특하다

문의처053-617-7620
모명재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 것이다. 조선에 귀화한 후 계산동 일대에 정착한 두사충은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현 대덕산) 밑으로 집을 옮기고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이라 하였다. 모명재라는 이름도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며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좀 더 알아보기>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것이다. 두사충의 호(號)는 모명(募明)으로 중국의 두릉(杜陵)이 고향이다.1592년 임란이 일어나자 그해 12월 명나라 제독(提督)이던 이여송(李如松)등과 함께 원병을 와서, 주위의 지형을 살펴서 진지에 적합한 장소를 만들도록 터를 잡아주는 임무인 수륙지획(水陸地劃) 주사(主事)를 맡았다. 따라서 그는 이여송의 일급 참모로서 항상 군진(軍陳)¹를 펴는데 조언을 했고, 조선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는 조선군과도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가져왔다. 정유재란 때 두 아들과 함께 원병을 와서 공을 세웠는데 난이 평정되고 난 후, 조선에 귀화하였다. 조선에 귀화한 두사충은 대구에 정착하면서 현재의 중앙공원 일대를 하사 받았는데 경상도 감영을 대구에 옮기자 그 땅을 내어놓고 현재의 계산동(桂山洞) 일대로 두씨들의 거주지를 옮겼다. 그러나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最頂山[현 대덕산])밑으로 거주지를 옮겨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이고 단(壇)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관복을 입고 고국의 천자(天子)를 향해 배례(排禮)를 올렸다고 한다. 그의 사후 자손들은 두사충의 유언에 따라 형제봉(兄第峰)기슭에다 묘소를 쓰게 되었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2월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모명재라고 한 것은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고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백천유수필지동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인데 이 것 또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두사충의 묘소앞에 있는 비문을 별도로 다시 새겨 모명재 앞뜰에 신도비를 세웠다. 이 비문은 이순신 장군의 7대손인 삼남 수군통제 이인수가 지었는데, 임란 당시 이순신과 두사충의 친밀한 관계가 후손들에게 까지 접촉을 갖게 했음을 알 수 있다. 모명재는 네모 반듯한 대지에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앞쪽에 모명재가 위치하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 기와집이다. 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들였으며, 앞쪽에는 반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건물 정면의 여모중방(대청앞 마루바닥에 가로지른 안방)밑은 붉은 벽돌을 쌓아막았다. 가구(架構)는 5량가의 견실한 구조로 종보 위에는 원형 판대공을 세웠으며 앞쪽의 창방(목조건물의 기둥 위에 가로 건너질러 연결하고 평방 또는 화반, 소로 등을 받는 가로재)과 장혀(도리를 받치는 긴나무)을 끼워 장식하였다. 20세기 초 대구지역 재실 건축의 형식을 잘 보여준다.

문의처053-742-3178
녹동서원

조선으로 귀화한 일본 장수 김충선을 기리는 서원 ‣ 임진왜란 때 귀화한 모하당 김충선을 추모하기 위해 1789년에 건립 ‣ 경내에는 녹동사, 향양문, 유적비, 서원 뒤쪽 삼정산에는 김충선의 묘소가 있다 ‣ 달성한일우호관, 김충선의 귀화 후 활약상을 보여주는 역사관, 체험실 등이 있다

문의처053-767-5790

문화

동화사

수려한 자연과 소중한 문화재를 품은 사찰 ‣ 팔공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신라시대 사찰 ‣ 대웅전, 마애불좌상,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비로암 삼층석탑,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 당간지주 등 경내에 문화유산이 많다 ‣ 전체 높이 33m에 이르는 세계 최대 규모 석조불상인 약사여래대불이 있다 입장료 - 어른 2,500원, 청소년 1,500원, 어린이 1,000원

문의처053-980-7900
이상화고택, 서상돈고택

일제에 항거한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를 만난다 ‣ 이상화 시인은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광복을 위해 저항 정신의 횃불을 밝힌 시를 지었다. 그의 시향이 이상화고택에 남아 있다 ‣ 서상돈은 정부가 일본에 빚을 많이 져 국권을 상실한다고 생각하여 1907년 금연으로 나라의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다

문의처 053-256-3762
대구향교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공자의 가르침이 깃든 배움터 ‣ 조선 건국과 더불어 1398년 지금의 중구 교동에 대구향교 창건 ‣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1932년 지금 자리에 대성전과 동서무, 명륜당 재이건. 1995년 유림회관이 신축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됨.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단아한 건물과 잘 가꿔진 조경 덕분에 조용히 사색하며 거닐기 좋다

문의처053-422-8700
불로동 고분군

팔공산 남쪽 기슭에 펼쳐진 올록볼록 솟은 거대한 고분군 ‣ 삼국시대 형성된 대규모 고분군. 210여 기의 고분이 밀집되어 있다. 한 바퀴 둘러보는 데 약 1시간~1시간 30분 소요된다. 능선이 완만해 아이들도 쉽게 오른다 ‣ 봄, 가을철에는 고분군 사이로 코스모스 등이 피어 한층 아름답고 서정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능선을 따라 올록볼록 솟은 고분군 뒤로 대구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 고분 아래 생태 습지가 조성되어 있어 아이들 학습 공간으로 활용도가 높다

문의처053-662-2363
옻골마을(경주최씨 종가)

문화재청이 선정한 ‘전국 10대 아름다운 돌담길’ ‣ 350년 수령의 회화나무숲을 지나 마을에 들어서면 옛 돌담길을 따라 고택 2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400여 년 이어온 고택을 통해 조선시대 생활양식을 살펴볼 수 있다 ‣ 마을에는 전통체험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마을 해설을 무료로 들을 수 있다

문의처053-983-6407
묘골마을과 육신사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있는 사당이다. 조선 세조 때의 사육신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浮) 등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문의처053-668-3162
도동서원

아름드리 은행나무와 아름다운 토담을 품은 고즈넉한 서원 ‣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 김굉필을 배향한 서원. 1568년 비슬산 동쪽에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지금 자리에 중건 ‣ 조선 중기 서원 건축의 특징을 살필 수 있다. 불필요한 장식 대신 간소함을 추구했으며 서원 입구인 수월루와 강당격인 중정당, 사당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중정당 기단에 여의주와 물고기를 물고 있는 4개의 용머리 조각과 수막새의 장식무늬가 빼어난 토담이 독특하다

문의처053-617-7620
모명재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 것이다. 조선에 귀화한 후 계산동 일대에 정착한 두사충은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현 대덕산) 밑으로 집을 옮기고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이라 하였다. 모명재라는 이름도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며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좀 더 알아보기>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것이다. 두사충의 호(號)는 모명(募明)으로 중국의 두릉(杜陵)이 고향이다.1592년 임란이 일어나자 그해 12월 명나라 제독(提督)이던 이여송(李如松)등과 함께 원병을 와서, 주위의 지형을 살펴서 진지에 적합한 장소를 만들도록 터를 잡아주는 임무인 수륙지획(水陸地劃) 주사(主事)를 맡았다. 따라서 그는 이여송의 일급 참모로서 항상 군진(軍陳)¹를 펴는데 조언을 했고, 조선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는 조선군과도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가져왔다. 정유재란 때 두 아들과 함께 원병을 와서 공을 세웠는데 난이 평정되고 난 후, 조선에 귀화하였다. 조선에 귀화한 두사충은 대구에 정착하면서 현재의 중앙공원 일대를 하사 받았는데 경상도 감영을 대구에 옮기자 그 땅을 내어놓고 현재의 계산동(桂山洞) 일대로 두씨들의 거주지를 옮겼다. 그러나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最頂山[현 대덕산])밑으로 거주지를 옮겨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이고 단(壇)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관복을 입고 고국의 천자(天子)를 향해 배례(排禮)를 올렸다고 한다. 그의 사후 자손들은 두사충의 유언에 따라 형제봉(兄第峰)기슭에다 묘소를 쓰게 되었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2월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모명재라고 한 것은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고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백천유수필지동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인데 이 것 또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두사충의 묘소앞에 있는 비문을 별도로 다시 새겨 모명재 앞뜰에 신도비를 세웠다. 이 비문은 이순신 장군의 7대손인 삼남 수군통제 이인수가 지었는데, 임란 당시 이순신과 두사충의 친밀한 관계가 후손들에게 까지 접촉을 갖게 했음을 알 수 있다. 모명재는 네모 반듯한 대지에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앞쪽에 모명재가 위치하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 기와집이다. 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들였으며, 앞쪽에는 반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건물 정면의 여모중방(대청앞 마루바닥에 가로지른 안방)밑은 붉은 벽돌을 쌓아막았다. 가구(架構)는 5량가의 견실한 구조로 종보 위에는 원형 판대공을 세웠으며 앞쪽의 창방(목조건물의 기둥 위에 가로 건너질러 연결하고 평방 또는 화반, 소로 등을 받는 가로재)과 장혀(도리를 받치는 긴나무)을 끼워 장식하였다. 20세기 초 대구지역 재실 건축의 형식을 잘 보여준다.

문의처053-742-3178
녹동서원

조선으로 귀화한 일본 장수 김충선을 기리는 서원 ‣ 임진왜란 때 귀화한 모하당 김충선을 추모하기 위해 1789년에 건립 ‣ 경내에는 녹동사, 향양문, 유적비, 서원 뒤쪽 삼정산에는 김충선의 묘소가 있다 ‣ 달성한일우호관, 김충선의 귀화 후 활약상을 보여주는 역사관, 체험실 등이 있다

문의처053-767-5790

박물관

동화사

수려한 자연과 소중한 문화재를 품은 사찰 ‣ 팔공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신라시대 사찰 ‣ 대웅전, 마애불좌상,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비로암 삼층석탑,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 당간지주 등 경내에 문화유산이 많다 ‣ 전체 높이 33m에 이르는 세계 최대 규모 석조불상인 약사여래대불이 있다 입장료 - 어른 2,500원, 청소년 1,500원, 어린이 1,000원

문의처053-980-7900
이상화고택, 서상돈고택

일제에 항거한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를 만난다 ‣ 이상화 시인은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광복을 위해 저항 정신의 횃불을 밝힌 시를 지었다. 그의 시향이 이상화고택에 남아 있다 ‣ 서상돈은 정부가 일본에 빚을 많이 져 국권을 상실한다고 생각하여 1907년 금연으로 나라의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다

문의처 053-256-3762
대구향교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공자의 가르침이 깃든 배움터 ‣ 조선 건국과 더불어 1398년 지금의 중구 교동에 대구향교 창건 ‣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1932년 지금 자리에 대성전과 동서무, 명륜당 재이건. 1995년 유림회관이 신축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됨.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단아한 건물과 잘 가꿔진 조경 덕분에 조용히 사색하며 거닐기 좋다

문의처053-422-8700
불로동 고분군

팔공산 남쪽 기슭에 펼쳐진 올록볼록 솟은 거대한 고분군 ‣ 삼국시대 형성된 대규모 고분군. 210여 기의 고분이 밀집되어 있다. 한 바퀴 둘러보는 데 약 1시간~1시간 30분 소요된다. 능선이 완만해 아이들도 쉽게 오른다 ‣ 봄, 가을철에는 고분군 사이로 코스모스 등이 피어 한층 아름답고 서정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능선을 따라 올록볼록 솟은 고분군 뒤로 대구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 고분 아래 생태 습지가 조성되어 있어 아이들 학습 공간으로 활용도가 높다

문의처053-662-2363
옻골마을(경주최씨 종가)

문화재청이 선정한 ‘전국 10대 아름다운 돌담길’ ‣ 350년 수령의 회화나무숲을 지나 마을에 들어서면 옛 돌담길을 따라 고택 2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400여 년 이어온 고택을 통해 조선시대 생활양식을 살펴볼 수 있다 ‣ 마을에는 전통체험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마을 해설을 무료로 들을 수 있다

문의처053-983-6407
묘골마을과 육신사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있는 사당이다. 조선 세조 때의 사육신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浮) 등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문의처053-668-3162
도동서원

아름드리 은행나무와 아름다운 토담을 품은 고즈넉한 서원 ‣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 김굉필을 배향한 서원. 1568년 비슬산 동쪽에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지금 자리에 중건 ‣ 조선 중기 서원 건축의 특징을 살필 수 있다. 불필요한 장식 대신 간소함을 추구했으며 서원 입구인 수월루와 강당격인 중정당, 사당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중정당 기단에 여의주와 물고기를 물고 있는 4개의 용머리 조각과 수막새의 장식무늬가 빼어난 토담이 독특하다

문의처053-617-7620
모명재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 것이다. 조선에 귀화한 후 계산동 일대에 정착한 두사충은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현 대덕산) 밑으로 집을 옮기고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이라 하였다. 모명재라는 이름도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며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좀 더 알아보기>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것이다. 두사충의 호(號)는 모명(募明)으로 중국의 두릉(杜陵)이 고향이다.1592년 임란이 일어나자 그해 12월 명나라 제독(提督)이던 이여송(李如松)등과 함께 원병을 와서, 주위의 지형을 살펴서 진지에 적합한 장소를 만들도록 터를 잡아주는 임무인 수륙지획(水陸地劃) 주사(主事)를 맡았다. 따라서 그는 이여송의 일급 참모로서 항상 군진(軍陳)¹를 펴는데 조언을 했고, 조선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는 조선군과도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가져왔다. 정유재란 때 두 아들과 함께 원병을 와서 공을 세웠는데 난이 평정되고 난 후, 조선에 귀화하였다. 조선에 귀화한 두사충은 대구에 정착하면서 현재의 중앙공원 일대를 하사 받았는데 경상도 감영을 대구에 옮기자 그 땅을 내어놓고 현재의 계산동(桂山洞) 일대로 두씨들의 거주지를 옮겼다. 그러나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最頂山[현 대덕산])밑으로 거주지를 옮겨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이고 단(壇)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관복을 입고 고국의 천자(天子)를 향해 배례(排禮)를 올렸다고 한다. 그의 사후 자손들은 두사충의 유언에 따라 형제봉(兄第峰)기슭에다 묘소를 쓰게 되었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2월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모명재라고 한 것은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고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백천유수필지동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인데 이 것 또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두사충의 묘소앞에 있는 비문을 별도로 다시 새겨 모명재 앞뜰에 신도비를 세웠다. 이 비문은 이순신 장군의 7대손인 삼남 수군통제 이인수가 지었는데, 임란 당시 이순신과 두사충의 친밀한 관계가 후손들에게 까지 접촉을 갖게 했음을 알 수 있다. 모명재는 네모 반듯한 대지에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앞쪽에 모명재가 위치하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 기와집이다. 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들였으며, 앞쪽에는 반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건물 정면의 여모중방(대청앞 마루바닥에 가로지른 안방)밑은 붉은 벽돌을 쌓아막았다. 가구(架構)는 5량가의 견실한 구조로 종보 위에는 원형 판대공을 세웠으며 앞쪽의 창방(목조건물의 기둥 위에 가로 건너질러 연결하고 평방 또는 화반, 소로 등을 받는 가로재)과 장혀(도리를 받치는 긴나무)을 끼워 장식하였다. 20세기 초 대구지역 재실 건축의 형식을 잘 보여준다.

문의처053-742-3178
녹동서원

조선으로 귀화한 일본 장수 김충선을 기리는 서원 ‣ 임진왜란 때 귀화한 모하당 김충선을 추모하기 위해 1789년에 건립 ‣ 경내에는 녹동사, 향양문, 유적비, 서원 뒤쪽 삼정산에는 김충선의 묘소가 있다 ‣ 달성한일우호관, 김충선의 귀화 후 활약상을 보여주는 역사관, 체험실 등이 있다

문의처053-767-5790

사찰

동화사

수려한 자연과 소중한 문화재를 품은 사찰 ‣ 팔공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신라시대 사찰 ‣ 대웅전, 마애불좌상,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비로암 삼층석탑,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 당간지주 등 경내에 문화유산이 많다 ‣ 전체 높이 33m에 이르는 세계 최대 규모 석조불상인 약사여래대불이 있다 입장료 - 어른 2,500원, 청소년 1,500원, 어린이 1,000원

문의처053-980-7900
이상화고택, 서상돈고택

일제에 항거한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를 만난다 ‣ 이상화 시인은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광복을 위해 저항 정신의 횃불을 밝힌 시를 지었다. 그의 시향이 이상화고택에 남아 있다 ‣ 서상돈은 정부가 일본에 빚을 많이 져 국권을 상실한다고 생각하여 1907년 금연으로 나라의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다

문의처 053-256-3762
대구향교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공자의 가르침이 깃든 배움터 ‣ 조선 건국과 더불어 1398년 지금의 중구 교동에 대구향교 창건 ‣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1932년 지금 자리에 대성전과 동서무, 명륜당 재이건. 1995년 유림회관이 신축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됨.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단아한 건물과 잘 가꿔진 조경 덕분에 조용히 사색하며 거닐기 좋다

문의처053-422-8700
불로동 고분군

팔공산 남쪽 기슭에 펼쳐진 올록볼록 솟은 거대한 고분군 ‣ 삼국시대 형성된 대규모 고분군. 210여 기의 고분이 밀집되어 있다. 한 바퀴 둘러보는 데 약 1시간~1시간 30분 소요된다. 능선이 완만해 아이들도 쉽게 오른다 ‣ 봄, 가을철에는 고분군 사이로 코스모스 등이 피어 한층 아름답고 서정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능선을 따라 올록볼록 솟은 고분군 뒤로 대구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 고분 아래 생태 습지가 조성되어 있어 아이들 학습 공간으로 활용도가 높다

문의처053-662-2363
옻골마을(경주최씨 종가)

문화재청이 선정한 ‘전국 10대 아름다운 돌담길’ ‣ 350년 수령의 회화나무숲을 지나 마을에 들어서면 옛 돌담길을 따라 고택 2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400여 년 이어온 고택을 통해 조선시대 생활양식을 살펴볼 수 있다 ‣ 마을에는 전통체험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마을 해설을 무료로 들을 수 있다

문의처053-983-6407
묘골마을과 육신사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있는 사당이다. 조선 세조 때의 사육신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浮) 등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문의처053-668-3162
도동서원

아름드리 은행나무와 아름다운 토담을 품은 고즈넉한 서원 ‣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 김굉필을 배향한 서원. 1568년 비슬산 동쪽에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지금 자리에 중건 ‣ 조선 중기 서원 건축의 특징을 살필 수 있다. 불필요한 장식 대신 간소함을 추구했으며 서원 입구인 수월루와 강당격인 중정당, 사당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중정당 기단에 여의주와 물고기를 물고 있는 4개의 용머리 조각과 수막새의 장식무늬가 빼어난 토담이 독특하다

문의처053-617-7620
모명재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 것이다. 조선에 귀화한 후 계산동 일대에 정착한 두사충은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현 대덕산) 밑으로 집을 옮기고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이라 하였다. 모명재라는 이름도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며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좀 더 알아보기>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것이다. 두사충의 호(號)는 모명(募明)으로 중국의 두릉(杜陵)이 고향이다.1592년 임란이 일어나자 그해 12월 명나라 제독(提督)이던 이여송(李如松)등과 함께 원병을 와서, 주위의 지형을 살펴서 진지에 적합한 장소를 만들도록 터를 잡아주는 임무인 수륙지획(水陸地劃) 주사(主事)를 맡았다. 따라서 그는 이여송의 일급 참모로서 항상 군진(軍陳)¹를 펴는데 조언을 했고, 조선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는 조선군과도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가져왔다. 정유재란 때 두 아들과 함께 원병을 와서 공을 세웠는데 난이 평정되고 난 후, 조선에 귀화하였다. 조선에 귀화한 두사충은 대구에 정착하면서 현재의 중앙공원 일대를 하사 받았는데 경상도 감영을 대구에 옮기자 그 땅을 내어놓고 현재의 계산동(桂山洞) 일대로 두씨들의 거주지를 옮겼다. 그러나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最頂山[현 대덕산])밑으로 거주지를 옮겨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이고 단(壇)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관복을 입고 고국의 천자(天子)를 향해 배례(排禮)를 올렸다고 한다. 그의 사후 자손들은 두사충의 유언에 따라 형제봉(兄第峰)기슭에다 묘소를 쓰게 되었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2월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모명재라고 한 것은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고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백천유수필지동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인데 이 것 또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두사충의 묘소앞에 있는 비문을 별도로 다시 새겨 모명재 앞뜰에 신도비를 세웠다. 이 비문은 이순신 장군의 7대손인 삼남 수군통제 이인수가 지었는데, 임란 당시 이순신과 두사충의 친밀한 관계가 후손들에게 까지 접촉을 갖게 했음을 알 수 있다. 모명재는 네모 반듯한 대지에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앞쪽에 모명재가 위치하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 기와집이다. 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들였으며, 앞쪽에는 반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건물 정면의 여모중방(대청앞 마루바닥에 가로지른 안방)밑은 붉은 벽돌을 쌓아막았다. 가구(架構)는 5량가의 견실한 구조로 종보 위에는 원형 판대공을 세웠으며 앞쪽의 창방(목조건물의 기둥 위에 가로 건너질러 연결하고 평방 또는 화반, 소로 등을 받는 가로재)과 장혀(도리를 받치는 긴나무)을 끼워 장식하였다. 20세기 초 대구지역 재실 건축의 형식을 잘 보여준다.

문의처053-742-3178
녹동서원

조선으로 귀화한 일본 장수 김충선을 기리는 서원 ‣ 임진왜란 때 귀화한 모하당 김충선을 추모하기 위해 1789년에 건립 ‣ 경내에는 녹동사, 향양문, 유적비, 서원 뒤쪽 삼정산에는 김충선의 묘소가 있다 ‣ 달성한일우호관, 김충선의 귀화 후 활약상을 보여주는 역사관, 체험실 등이 있다

문의처053-767-5790

서원

동화사

수려한 자연과 소중한 문화재를 품은 사찰 ‣ 팔공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신라시대 사찰 ‣ 대웅전, 마애불좌상,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비로암 삼층석탑,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 당간지주 등 경내에 문화유산이 많다 ‣ 전체 높이 33m에 이르는 세계 최대 규모 석조불상인 약사여래대불이 있다 입장료 - 어른 2,500원, 청소년 1,500원, 어린이 1,000원

문의처053-980-7900
이상화고택, 서상돈고택

일제에 항거한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를 만난다 ‣ 이상화 시인은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광복을 위해 저항 정신의 횃불을 밝힌 시를 지었다. 그의 시향이 이상화고택에 남아 있다 ‣ 서상돈은 정부가 일본에 빚을 많이 져 국권을 상실한다고 생각하여 1907년 금연으로 나라의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다

문의처 053-256-3762
대구향교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공자의 가르침이 깃든 배움터 ‣ 조선 건국과 더불어 1398년 지금의 중구 교동에 대구향교 창건 ‣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1932년 지금 자리에 대성전과 동서무, 명륜당 재이건. 1995년 유림회관이 신축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됨.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단아한 건물과 잘 가꿔진 조경 덕분에 조용히 사색하며 거닐기 좋다

문의처053-422-8700
불로동 고분군

팔공산 남쪽 기슭에 펼쳐진 올록볼록 솟은 거대한 고분군 ‣ 삼국시대 형성된 대규모 고분군. 210여 기의 고분이 밀집되어 있다. 한 바퀴 둘러보는 데 약 1시간~1시간 30분 소요된다. 능선이 완만해 아이들도 쉽게 오른다 ‣ 봄, 가을철에는 고분군 사이로 코스모스 등이 피어 한층 아름답고 서정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능선을 따라 올록볼록 솟은 고분군 뒤로 대구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 고분 아래 생태 습지가 조성되어 있어 아이들 학습 공간으로 활용도가 높다

문의처053-662-2363
옻골마을(경주최씨 종가)

문화재청이 선정한 ‘전국 10대 아름다운 돌담길’ ‣ 350년 수령의 회화나무숲을 지나 마을에 들어서면 옛 돌담길을 따라 고택 2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400여 년 이어온 고택을 통해 조선시대 생활양식을 살펴볼 수 있다 ‣ 마을에는 전통체험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마을 해설을 무료로 들을 수 있다

문의처053-983-6407
묘골마을과 육신사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있는 사당이다. 조선 세조 때의 사육신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浮) 등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문의처053-668-3162
도동서원

아름드리 은행나무와 아름다운 토담을 품은 고즈넉한 서원 ‣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 김굉필을 배향한 서원. 1568년 비슬산 동쪽에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지금 자리에 중건 ‣ 조선 중기 서원 건축의 특징을 살필 수 있다. 불필요한 장식 대신 간소함을 추구했으며 서원 입구인 수월루와 강당격인 중정당, 사당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중정당 기단에 여의주와 물고기를 물고 있는 4개의 용머리 조각과 수막새의 장식무늬가 빼어난 토담이 독특하다

문의처053-617-7620
모명재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 것이다. 조선에 귀화한 후 계산동 일대에 정착한 두사충은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현 대덕산) 밑으로 집을 옮기고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이라 하였다. 모명재라는 이름도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며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좀 더 알아보기>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것이다. 두사충의 호(號)는 모명(募明)으로 중국의 두릉(杜陵)이 고향이다.1592년 임란이 일어나자 그해 12월 명나라 제독(提督)이던 이여송(李如松)등과 함께 원병을 와서, 주위의 지형을 살펴서 진지에 적합한 장소를 만들도록 터를 잡아주는 임무인 수륙지획(水陸地劃) 주사(主事)를 맡았다. 따라서 그는 이여송의 일급 참모로서 항상 군진(軍陳)¹를 펴는데 조언을 했고, 조선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는 조선군과도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가져왔다. 정유재란 때 두 아들과 함께 원병을 와서 공을 세웠는데 난이 평정되고 난 후, 조선에 귀화하였다. 조선에 귀화한 두사충은 대구에 정착하면서 현재의 중앙공원 일대를 하사 받았는데 경상도 감영을 대구에 옮기자 그 땅을 내어놓고 현재의 계산동(桂山洞) 일대로 두씨들의 거주지를 옮겼다. 그러나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最頂山[현 대덕산])밑으로 거주지를 옮겨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이고 단(壇)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관복을 입고 고국의 천자(天子)를 향해 배례(排禮)를 올렸다고 한다. 그의 사후 자손들은 두사충의 유언에 따라 형제봉(兄第峰)기슭에다 묘소를 쓰게 되었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2월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모명재라고 한 것은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고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백천유수필지동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인데 이 것 또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두사충의 묘소앞에 있는 비문을 별도로 다시 새겨 모명재 앞뜰에 신도비를 세웠다. 이 비문은 이순신 장군의 7대손인 삼남 수군통제 이인수가 지었는데, 임란 당시 이순신과 두사충의 친밀한 관계가 후손들에게 까지 접촉을 갖게 했음을 알 수 있다. 모명재는 네모 반듯한 대지에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앞쪽에 모명재가 위치하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 기와집이다. 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들였으며, 앞쪽에는 반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건물 정면의 여모중방(대청앞 마루바닥에 가로지른 안방)밑은 붉은 벽돌을 쌓아막았다. 가구(架構)는 5량가의 견실한 구조로 종보 위에는 원형 판대공을 세웠으며 앞쪽의 창방(목조건물의 기둥 위에 가로 건너질러 연결하고 평방 또는 화반, 소로 등을 받는 가로재)과 장혀(도리를 받치는 긴나무)을 끼워 장식하였다. 20세기 초 대구지역 재실 건축의 형식을 잘 보여준다.

문의처053-742-3178
녹동서원

조선으로 귀화한 일본 장수 김충선을 기리는 서원 ‣ 임진왜란 때 귀화한 모하당 김충선을 추모하기 위해 1789년에 건립 ‣ 경내에는 녹동사, 향양문, 유적비, 서원 뒤쪽 삼정산에는 김충선의 묘소가 있다 ‣ 달성한일우호관, 김충선의 귀화 후 활약상을 보여주는 역사관, 체험실 등이 있다

문의처053-767-5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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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사

수려한 자연과 소중한 문화재를 품은 사찰 ‣ 팔공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신라시대 사찰 ‣ 대웅전, 마애불좌상,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비로암 삼층석탑,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 당간지주 등 경내에 문화유산이 많다 ‣ 전체 높이 33m에 이르는 세계 최대 규모 석조불상인 약사여래대불이 있다 입장료 - 어른 2,500원, 청소년 1,500원, 어린이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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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화고택, 서상돈고택

일제에 항거한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를 만난다 ‣ 이상화 시인은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광복을 위해 저항 정신의 횃불을 밝힌 시를 지었다. 그의 시향이 이상화고택에 남아 있다 ‣ 서상돈은 정부가 일본에 빚을 많이 져 국권을 상실한다고 생각하여 1907년 금연으로 나라의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다

문의처 053-256-3762
대구향교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공자의 가르침이 깃든 배움터 ‣ 조선 건국과 더불어 1398년 지금의 중구 교동에 대구향교 창건 ‣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1932년 지금 자리에 대성전과 동서무, 명륜당 재이건. 1995년 유림회관이 신축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됨.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단아한 건물과 잘 가꿔진 조경 덕분에 조용히 사색하며 거닐기 좋다

문의처053-422-8700
불로동 고분군

팔공산 남쪽 기슭에 펼쳐진 올록볼록 솟은 거대한 고분군 ‣ 삼국시대 형성된 대규모 고분군. 210여 기의 고분이 밀집되어 있다. 한 바퀴 둘러보는 데 약 1시간~1시간 30분 소요된다. 능선이 완만해 아이들도 쉽게 오른다 ‣ 봄, 가을철에는 고분군 사이로 코스모스 등이 피어 한층 아름답고 서정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능선을 따라 올록볼록 솟은 고분군 뒤로 대구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 고분 아래 생태 습지가 조성되어 있어 아이들 학습 공간으로 활용도가 높다

문의처053-662-2363
옻골마을(경주최씨 종가)

문화재청이 선정한 ‘전국 10대 아름다운 돌담길’ ‣ 350년 수령의 회화나무숲을 지나 마을에 들어서면 옛 돌담길을 따라 고택 2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400여 년 이어온 고택을 통해 조선시대 생활양식을 살펴볼 수 있다 ‣ 마을에는 전통체험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마을 해설을 무료로 들을 수 있다

문의처053-983-6407
묘골마을과 육신사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있는 사당이다. 조선 세조 때의 사육신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浮) 등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문의처053-668-3162
도동서원

아름드리 은행나무와 아름다운 토담을 품은 고즈넉한 서원 ‣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 김굉필을 배향한 서원. 1568년 비슬산 동쪽에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지금 자리에 중건 ‣ 조선 중기 서원 건축의 특징을 살필 수 있다. 불필요한 장식 대신 간소함을 추구했으며 서원 입구인 수월루와 강당격인 중정당, 사당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중정당 기단에 여의주와 물고기를 물고 있는 4개의 용머리 조각과 수막새의 장식무늬가 빼어난 토담이 독특하다

문의처053-617-7620
모명재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 것이다. 조선에 귀화한 후 계산동 일대에 정착한 두사충은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현 대덕산) 밑으로 집을 옮기고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이라 하였다. 모명재라는 이름도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며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좀 더 알아보기>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것이다. 두사충의 호(號)는 모명(募明)으로 중국의 두릉(杜陵)이 고향이다.1592년 임란이 일어나자 그해 12월 명나라 제독(提督)이던 이여송(李如松)등과 함께 원병을 와서, 주위의 지형을 살펴서 진지에 적합한 장소를 만들도록 터를 잡아주는 임무인 수륙지획(水陸地劃) 주사(主事)를 맡았다. 따라서 그는 이여송의 일급 참모로서 항상 군진(軍陳)¹를 펴는데 조언을 했고, 조선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는 조선군과도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가져왔다. 정유재란 때 두 아들과 함께 원병을 와서 공을 세웠는데 난이 평정되고 난 후, 조선에 귀화하였다. 조선에 귀화한 두사충은 대구에 정착하면서 현재의 중앙공원 일대를 하사 받았는데 경상도 감영을 대구에 옮기자 그 땅을 내어놓고 현재의 계산동(桂山洞) 일대로 두씨들의 거주지를 옮겼다. 그러나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最頂山[현 대덕산])밑으로 거주지를 옮겨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이고 단(壇)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관복을 입고 고국의 천자(天子)를 향해 배례(排禮)를 올렸다고 한다. 그의 사후 자손들은 두사충의 유언에 따라 형제봉(兄第峰)기슭에다 묘소를 쓰게 되었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2월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모명재라고 한 것은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고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백천유수필지동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인데 이 것 또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두사충의 묘소앞에 있는 비문을 별도로 다시 새겨 모명재 앞뜰에 신도비를 세웠다. 이 비문은 이순신 장군의 7대손인 삼남 수군통제 이인수가 지었는데, 임란 당시 이순신과 두사충의 친밀한 관계가 후손들에게 까지 접촉을 갖게 했음을 알 수 있다. 모명재는 네모 반듯한 대지에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앞쪽에 모명재가 위치하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 기와집이다. 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들였으며, 앞쪽에는 반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건물 정면의 여모중방(대청앞 마루바닥에 가로지른 안방)밑은 붉은 벽돌을 쌓아막았다. 가구(架構)는 5량가의 견실한 구조로 종보 위에는 원형 판대공을 세웠으며 앞쪽의 창방(목조건물의 기둥 위에 가로 건너질러 연결하고 평방 또는 화반, 소로 등을 받는 가로재)과 장혀(도리를 받치는 긴나무)을 끼워 장식하였다. 20세기 초 대구지역 재실 건축의 형식을 잘 보여준다.

문의처053-742-3178
녹동서원

조선으로 귀화한 일본 장수 김충선을 기리는 서원 ‣ 임진왜란 때 귀화한 모하당 김충선을 추모하기 위해 1789년에 건립 ‣ 경내에는 녹동사, 향양문, 유적비, 서원 뒤쪽 삼정산에는 김충선의 묘소가 있다 ‣ 달성한일우호관, 김충선의 귀화 후 활약상을 보여주는 역사관, 체험실 등이 있다

문의처053-767-5790

시장

동화사

수려한 자연과 소중한 문화재를 품은 사찰 ‣ 팔공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신라시대 사찰 ‣ 대웅전, 마애불좌상,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비로암 삼층석탑,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 당간지주 등 경내에 문화유산이 많다 ‣ 전체 높이 33m에 이르는 세계 최대 규모 석조불상인 약사여래대불이 있다 입장료 - 어른 2,500원, 청소년 1,500원, 어린이 1,000원

문의처053-980-7900
이상화고택, 서상돈고택

일제에 항거한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를 만난다 ‣ 이상화 시인은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광복을 위해 저항 정신의 횃불을 밝힌 시를 지었다. 그의 시향이 이상화고택에 남아 있다 ‣ 서상돈은 정부가 일본에 빚을 많이 져 국권을 상실한다고 생각하여 1907년 금연으로 나라의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다

문의처 053-256-3762
대구향교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공자의 가르침이 깃든 배움터 ‣ 조선 건국과 더불어 1398년 지금의 중구 교동에 대구향교 창건 ‣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1932년 지금 자리에 대성전과 동서무, 명륜당 재이건. 1995년 유림회관이 신축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됨.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단아한 건물과 잘 가꿔진 조경 덕분에 조용히 사색하며 거닐기 좋다

문의처053-422-8700
불로동 고분군

팔공산 남쪽 기슭에 펼쳐진 올록볼록 솟은 거대한 고분군 ‣ 삼국시대 형성된 대규모 고분군. 210여 기의 고분이 밀집되어 있다. 한 바퀴 둘러보는 데 약 1시간~1시간 30분 소요된다. 능선이 완만해 아이들도 쉽게 오른다 ‣ 봄, 가을철에는 고분군 사이로 코스모스 등이 피어 한층 아름답고 서정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능선을 따라 올록볼록 솟은 고분군 뒤로 대구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 고분 아래 생태 습지가 조성되어 있어 아이들 학습 공간으로 활용도가 높다

문의처053-662-2363
옻골마을(경주최씨 종가)

문화재청이 선정한 ‘전국 10대 아름다운 돌담길’ ‣ 350년 수령의 회화나무숲을 지나 마을에 들어서면 옛 돌담길을 따라 고택 2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400여 년 이어온 고택을 통해 조선시대 생활양식을 살펴볼 수 있다 ‣ 마을에는 전통체험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마을 해설을 무료로 들을 수 있다

문의처053-983-6407
묘골마을과 육신사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있는 사당이다. 조선 세조 때의 사육신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浮) 등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문의처053-668-3162
도동서원

아름드리 은행나무와 아름다운 토담을 품은 고즈넉한 서원 ‣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 김굉필을 배향한 서원. 1568년 비슬산 동쪽에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지금 자리에 중건 ‣ 조선 중기 서원 건축의 특징을 살필 수 있다. 불필요한 장식 대신 간소함을 추구했으며 서원 입구인 수월루와 강당격인 중정당, 사당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중정당 기단에 여의주와 물고기를 물고 있는 4개의 용머리 조각과 수막새의 장식무늬가 빼어난 토담이 독특하다

문의처053-617-7620
모명재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 것이다. 조선에 귀화한 후 계산동 일대에 정착한 두사충은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현 대덕산) 밑으로 집을 옮기고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이라 하였다. 모명재라는 이름도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며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좀 더 알아보기>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것이다. 두사충의 호(號)는 모명(募明)으로 중국의 두릉(杜陵)이 고향이다.1592년 임란이 일어나자 그해 12월 명나라 제독(提督)이던 이여송(李如松)등과 함께 원병을 와서, 주위의 지형을 살펴서 진지에 적합한 장소를 만들도록 터를 잡아주는 임무인 수륙지획(水陸地劃) 주사(主事)를 맡았다. 따라서 그는 이여송의 일급 참모로서 항상 군진(軍陳)¹를 펴는데 조언을 했고, 조선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는 조선군과도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가져왔다. 정유재란 때 두 아들과 함께 원병을 와서 공을 세웠는데 난이 평정되고 난 후, 조선에 귀화하였다. 조선에 귀화한 두사충은 대구에 정착하면서 현재의 중앙공원 일대를 하사 받았는데 경상도 감영을 대구에 옮기자 그 땅을 내어놓고 현재의 계산동(桂山洞) 일대로 두씨들의 거주지를 옮겼다. 그러나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最頂山[현 대덕산])밑으로 거주지를 옮겨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이고 단(壇)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관복을 입고 고국의 천자(天子)를 향해 배례(排禮)를 올렸다고 한다. 그의 사후 자손들은 두사충의 유언에 따라 형제봉(兄第峰)기슭에다 묘소를 쓰게 되었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2월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모명재라고 한 것은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고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백천유수필지동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인데 이 것 또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두사충의 묘소앞에 있는 비문을 별도로 다시 새겨 모명재 앞뜰에 신도비를 세웠다. 이 비문은 이순신 장군의 7대손인 삼남 수군통제 이인수가 지었는데, 임란 당시 이순신과 두사충의 친밀한 관계가 후손들에게 까지 접촉을 갖게 했음을 알 수 있다. 모명재는 네모 반듯한 대지에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앞쪽에 모명재가 위치하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 기와집이다. 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들였으며, 앞쪽에는 반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건물 정면의 여모중방(대청앞 마루바닥에 가로지른 안방)밑은 붉은 벽돌을 쌓아막았다. 가구(架構)는 5량가의 견실한 구조로 종보 위에는 원형 판대공을 세웠으며 앞쪽의 창방(목조건물의 기둥 위에 가로 건너질러 연결하고 평방 또는 화반, 소로 등을 받는 가로재)과 장혀(도리를 받치는 긴나무)을 끼워 장식하였다. 20세기 초 대구지역 재실 건축의 형식을 잘 보여준다.

문의처053-742-3178
녹동서원

조선으로 귀화한 일본 장수 김충선을 기리는 서원 ‣ 임진왜란 때 귀화한 모하당 김충선을 추모하기 위해 1789년에 건립 ‣ 경내에는 녹동사, 향양문, 유적비, 서원 뒤쪽 삼정산에는 김충선의 묘소가 있다 ‣ 달성한일우호관, 김충선의 귀화 후 활약상을 보여주는 역사관, 체험실 등이 있다

문의처053-767-5790

역사

동화사

수려한 자연과 소중한 문화재를 품은 사찰 ‣ 팔공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신라시대 사찰 ‣ 대웅전, 마애불좌상,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비로암 삼층석탑,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 당간지주 등 경내에 문화유산이 많다 ‣ 전체 높이 33m에 이르는 세계 최대 규모 석조불상인 약사여래대불이 있다 입장료 - 어른 2,500원, 청소년 1,500원, 어린이 1,000원

문의처053-980-7900
이상화고택, 서상돈고택

일제에 항거한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를 만난다 ‣ 이상화 시인은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광복을 위해 저항 정신의 횃불을 밝힌 시를 지었다. 그의 시향이 이상화고택에 남아 있다 ‣ 서상돈은 정부가 일본에 빚을 많이 져 국권을 상실한다고 생각하여 1907년 금연으로 나라의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다

문의처 053-256-3762
대구향교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공자의 가르침이 깃든 배움터 ‣ 조선 건국과 더불어 1398년 지금의 중구 교동에 대구향교 창건 ‣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1932년 지금 자리에 대성전과 동서무, 명륜당 재이건. 1995년 유림회관이 신축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됨.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단아한 건물과 잘 가꿔진 조경 덕분에 조용히 사색하며 거닐기 좋다

문의처053-422-8700
불로동 고분군

팔공산 남쪽 기슭에 펼쳐진 올록볼록 솟은 거대한 고분군 ‣ 삼국시대 형성된 대규모 고분군. 210여 기의 고분이 밀집되어 있다. 한 바퀴 둘러보는 데 약 1시간~1시간 30분 소요된다. 능선이 완만해 아이들도 쉽게 오른다 ‣ 봄, 가을철에는 고분군 사이로 코스모스 등이 피어 한층 아름답고 서정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능선을 따라 올록볼록 솟은 고분군 뒤로 대구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 고분 아래 생태 습지가 조성되어 있어 아이들 학습 공간으로 활용도가 높다

문의처053-662-2363
옻골마을(경주최씨 종가)

문화재청이 선정한 ‘전국 10대 아름다운 돌담길’ ‣ 350년 수령의 회화나무숲을 지나 마을에 들어서면 옛 돌담길을 따라 고택 2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400여 년 이어온 고택을 통해 조선시대 생활양식을 살펴볼 수 있다 ‣ 마을에는 전통체험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마을 해설을 무료로 들을 수 있다

문의처053-983-6407
묘골마을과 육신사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있는 사당이다. 조선 세조 때의 사육신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浮) 등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문의처053-668-3162
도동서원

아름드리 은행나무와 아름다운 토담을 품은 고즈넉한 서원 ‣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 김굉필을 배향한 서원. 1568년 비슬산 동쪽에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지금 자리에 중건 ‣ 조선 중기 서원 건축의 특징을 살필 수 있다. 불필요한 장식 대신 간소함을 추구했으며 서원 입구인 수월루와 강당격인 중정당, 사당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중정당 기단에 여의주와 물고기를 물고 있는 4개의 용머리 조각과 수막새의 장식무늬가 빼어난 토담이 독특하다

문의처053-617-7620
모명재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 것이다. 조선에 귀화한 후 계산동 일대에 정착한 두사충은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현 대덕산) 밑으로 집을 옮기고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이라 하였다. 모명재라는 이름도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며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좀 더 알아보기>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것이다. 두사충의 호(號)는 모명(募明)으로 중국의 두릉(杜陵)이 고향이다.1592년 임란이 일어나자 그해 12월 명나라 제독(提督)이던 이여송(李如松)등과 함께 원병을 와서, 주위의 지형을 살펴서 진지에 적합한 장소를 만들도록 터를 잡아주는 임무인 수륙지획(水陸地劃) 주사(主事)를 맡았다. 따라서 그는 이여송의 일급 참모로서 항상 군진(軍陳)¹를 펴는데 조언을 했고, 조선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는 조선군과도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가져왔다. 정유재란 때 두 아들과 함께 원병을 와서 공을 세웠는데 난이 평정되고 난 후, 조선에 귀화하였다. 조선에 귀화한 두사충은 대구에 정착하면서 현재의 중앙공원 일대를 하사 받았는데 경상도 감영을 대구에 옮기자 그 땅을 내어놓고 현재의 계산동(桂山洞) 일대로 두씨들의 거주지를 옮겼다. 그러나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最頂山[현 대덕산])밑으로 거주지를 옮겨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이고 단(壇)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관복을 입고 고국의 천자(天子)를 향해 배례(排禮)를 올렸다고 한다. 그의 사후 자손들은 두사충의 유언에 따라 형제봉(兄第峰)기슭에다 묘소를 쓰게 되었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2월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모명재라고 한 것은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고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백천유수필지동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인데 이 것 또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두사충의 묘소앞에 있는 비문을 별도로 다시 새겨 모명재 앞뜰에 신도비를 세웠다. 이 비문은 이순신 장군의 7대손인 삼남 수군통제 이인수가 지었는데, 임란 당시 이순신과 두사충의 친밀한 관계가 후손들에게 까지 접촉을 갖게 했음을 알 수 있다. 모명재는 네모 반듯한 대지에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앞쪽에 모명재가 위치하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 기와집이다. 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들였으며, 앞쪽에는 반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건물 정면의 여모중방(대청앞 마루바닥에 가로지른 안방)밑은 붉은 벽돌을 쌓아막았다. 가구(架構)는 5량가의 견실한 구조로 종보 위에는 원형 판대공을 세웠으며 앞쪽의 창방(목조건물의 기둥 위에 가로 건너질러 연결하고 평방 또는 화반, 소로 등을 받는 가로재)과 장혀(도리를 받치는 긴나무)을 끼워 장식하였다. 20세기 초 대구지역 재실 건축의 형식을 잘 보여준다.

문의처053-742-3178
녹동서원

조선으로 귀화한 일본 장수 김충선을 기리는 서원 ‣ 임진왜란 때 귀화한 모하당 김충선을 추모하기 위해 1789년에 건립 ‣ 경내에는 녹동사, 향양문, 유적비, 서원 뒤쪽 삼정산에는 김충선의 묘소가 있다 ‣ 달성한일우호관, 김충선의 귀화 후 활약상을 보여주는 역사관, 체험실 등이 있다

문의처053-767-5790

전통

동화사

수려한 자연과 소중한 문화재를 품은 사찰 ‣ 팔공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신라시대 사찰 ‣ 대웅전, 마애불좌상,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비로암 삼층석탑,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 당간지주 등 경내에 문화유산이 많다 ‣ 전체 높이 33m에 이르는 세계 최대 규모 석조불상인 약사여래대불이 있다 입장료 - 어른 2,500원, 청소년 1,500원, 어린이 1,000원

문의처053-980-7900
이상화고택, 서상돈고택

일제에 항거한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를 만난다 ‣ 이상화 시인은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광복을 위해 저항 정신의 횃불을 밝힌 시를 지었다. 그의 시향이 이상화고택에 남아 있다 ‣ 서상돈은 정부가 일본에 빚을 많이 져 국권을 상실한다고 생각하여 1907년 금연으로 나라의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다

문의처 053-256-3762
대구향교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공자의 가르침이 깃든 배움터 ‣ 조선 건국과 더불어 1398년 지금의 중구 교동에 대구향교 창건 ‣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1932년 지금 자리에 대성전과 동서무, 명륜당 재이건. 1995년 유림회관이 신축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됨.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단아한 건물과 잘 가꿔진 조경 덕분에 조용히 사색하며 거닐기 좋다

문의처053-422-8700
불로동 고분군

팔공산 남쪽 기슭에 펼쳐진 올록볼록 솟은 거대한 고분군 ‣ 삼국시대 형성된 대규모 고분군. 210여 기의 고분이 밀집되어 있다. 한 바퀴 둘러보는 데 약 1시간~1시간 30분 소요된다. 능선이 완만해 아이들도 쉽게 오른다 ‣ 봄, 가을철에는 고분군 사이로 코스모스 등이 피어 한층 아름답고 서정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능선을 따라 올록볼록 솟은 고분군 뒤로 대구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 고분 아래 생태 습지가 조성되어 있어 아이들 학습 공간으로 활용도가 높다

문의처053-662-2363
옻골마을(경주최씨 종가)

문화재청이 선정한 ‘전국 10대 아름다운 돌담길’ ‣ 350년 수령의 회화나무숲을 지나 마을에 들어서면 옛 돌담길을 따라 고택 2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400여 년 이어온 고택을 통해 조선시대 생활양식을 살펴볼 수 있다 ‣ 마을에는 전통체험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마을 해설을 무료로 들을 수 있다

문의처053-983-6407
묘골마을과 육신사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있는 사당이다. 조선 세조 때의 사육신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浮) 등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문의처053-668-3162
도동서원

아름드리 은행나무와 아름다운 토담을 품은 고즈넉한 서원 ‣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 김굉필을 배향한 서원. 1568년 비슬산 동쪽에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지금 자리에 중건 ‣ 조선 중기 서원 건축의 특징을 살필 수 있다. 불필요한 장식 대신 간소함을 추구했으며 서원 입구인 수월루와 강당격인 중정당, 사당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중정당 기단에 여의주와 물고기를 물고 있는 4개의 용머리 조각과 수막새의 장식무늬가 빼어난 토담이 독특하다

문의처053-617-7620
모명재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 것이다. 조선에 귀화한 후 계산동 일대에 정착한 두사충은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현 대덕산) 밑으로 집을 옮기고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이라 하였다. 모명재라는 이름도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며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좀 더 알아보기>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것이다. 두사충의 호(號)는 모명(募明)으로 중국의 두릉(杜陵)이 고향이다.1592년 임란이 일어나자 그해 12월 명나라 제독(提督)이던 이여송(李如松)등과 함께 원병을 와서, 주위의 지형을 살펴서 진지에 적합한 장소를 만들도록 터를 잡아주는 임무인 수륙지획(水陸地劃) 주사(主事)를 맡았다. 따라서 그는 이여송의 일급 참모로서 항상 군진(軍陳)¹를 펴는데 조언을 했고, 조선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는 조선군과도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가져왔다. 정유재란 때 두 아들과 함께 원병을 와서 공을 세웠는데 난이 평정되고 난 후, 조선에 귀화하였다. 조선에 귀화한 두사충은 대구에 정착하면서 현재의 중앙공원 일대를 하사 받았는데 경상도 감영을 대구에 옮기자 그 땅을 내어놓고 현재의 계산동(桂山洞) 일대로 두씨들의 거주지를 옮겼다. 그러나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最頂山[현 대덕산])밑으로 거주지를 옮겨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이고 단(壇)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관복을 입고 고국의 천자(天子)를 향해 배례(排禮)를 올렸다고 한다. 그의 사후 자손들은 두사충의 유언에 따라 형제봉(兄第峰)기슭에다 묘소를 쓰게 되었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2월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모명재라고 한 것은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고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백천유수필지동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인데 이 것 또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두사충의 묘소앞에 있는 비문을 별도로 다시 새겨 모명재 앞뜰에 신도비를 세웠다. 이 비문은 이순신 장군의 7대손인 삼남 수군통제 이인수가 지었는데, 임란 당시 이순신과 두사충의 친밀한 관계가 후손들에게 까지 접촉을 갖게 했음을 알 수 있다. 모명재는 네모 반듯한 대지에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앞쪽에 모명재가 위치하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 기와집이다. 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들였으며, 앞쪽에는 반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건물 정면의 여모중방(대청앞 마루바닥에 가로지른 안방)밑은 붉은 벽돌을 쌓아막았다. 가구(架構)는 5량가의 견실한 구조로 종보 위에는 원형 판대공을 세웠으며 앞쪽의 창방(목조건물의 기둥 위에 가로 건너질러 연결하고 평방 또는 화반, 소로 등을 받는 가로재)과 장혀(도리를 받치는 긴나무)을 끼워 장식하였다. 20세기 초 대구지역 재실 건축의 형식을 잘 보여준다.

문의처053-742-3178
녹동서원

조선으로 귀화한 일본 장수 김충선을 기리는 서원 ‣ 임진왜란 때 귀화한 모하당 김충선을 추모하기 위해 1789년에 건립 ‣ 경내에는 녹동사, 향양문, 유적비, 서원 뒤쪽 삼정산에는 김충선의 묘소가 있다 ‣ 달성한일우호관, 김충선의 귀화 후 활약상을 보여주는 역사관, 체험실 등이 있다

문의처053-767-5790

체험

동화사

수려한 자연과 소중한 문화재를 품은 사찰 ‣ 팔공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신라시대 사찰 ‣ 대웅전, 마애불좌상,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비로암 삼층석탑,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 당간지주 등 경내에 문화유산이 많다 ‣ 전체 높이 33m에 이르는 세계 최대 규모 석조불상인 약사여래대불이 있다 입장료 - 어른 2,500원, 청소년 1,500원, 어린이 1,000원

문의처053-980-7900
이상화고택, 서상돈고택

일제에 항거한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를 만난다 ‣ 이상화 시인은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광복을 위해 저항 정신의 횃불을 밝힌 시를 지었다. 그의 시향이 이상화고택에 남아 있다 ‣ 서상돈은 정부가 일본에 빚을 많이 져 국권을 상실한다고 생각하여 1907년 금연으로 나라의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다

문의처 053-256-3762
대구향교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공자의 가르침이 깃든 배움터 ‣ 조선 건국과 더불어 1398년 지금의 중구 교동에 대구향교 창건 ‣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1932년 지금 자리에 대성전과 동서무, 명륜당 재이건. 1995년 유림회관이 신축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됨.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단아한 건물과 잘 가꿔진 조경 덕분에 조용히 사색하며 거닐기 좋다

문의처053-422-8700
불로동 고분군

팔공산 남쪽 기슭에 펼쳐진 올록볼록 솟은 거대한 고분군 ‣ 삼국시대 형성된 대규모 고분군. 210여 기의 고분이 밀집되어 있다. 한 바퀴 둘러보는 데 약 1시간~1시간 30분 소요된다. 능선이 완만해 아이들도 쉽게 오른다 ‣ 봄, 가을철에는 고분군 사이로 코스모스 등이 피어 한층 아름답고 서정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능선을 따라 올록볼록 솟은 고분군 뒤로 대구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 고분 아래 생태 습지가 조성되어 있어 아이들 학습 공간으로 활용도가 높다

문의처053-662-2363
옻골마을(경주최씨 종가)

문화재청이 선정한 ‘전국 10대 아름다운 돌담길’ ‣ 350년 수령의 회화나무숲을 지나 마을에 들어서면 옛 돌담길을 따라 고택 2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400여 년 이어온 고택을 통해 조선시대 생활양식을 살펴볼 수 있다 ‣ 마을에는 전통체험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마을 해설을 무료로 들을 수 있다

문의처053-983-6407
묘골마을과 육신사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있는 사당이다. 조선 세조 때의 사육신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浮) 등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문의처053-668-3162
도동서원

아름드리 은행나무와 아름다운 토담을 품은 고즈넉한 서원 ‣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 김굉필을 배향한 서원. 1568년 비슬산 동쪽에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지금 자리에 중건 ‣ 조선 중기 서원 건축의 특징을 살필 수 있다. 불필요한 장식 대신 간소함을 추구했으며 서원 입구인 수월루와 강당격인 중정당, 사당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중정당 기단에 여의주와 물고기를 물고 있는 4개의 용머리 조각과 수막새의 장식무늬가 빼어난 토담이 독특하다

문의처053-617-7620
모명재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 것이다. 조선에 귀화한 후 계산동 일대에 정착한 두사충은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현 대덕산) 밑으로 집을 옮기고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이라 하였다. 모명재라는 이름도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며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좀 더 알아보기>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것이다. 두사충의 호(號)는 모명(募明)으로 중국의 두릉(杜陵)이 고향이다.1592년 임란이 일어나자 그해 12월 명나라 제독(提督)이던 이여송(李如松)등과 함께 원병을 와서, 주위의 지형을 살펴서 진지에 적합한 장소를 만들도록 터를 잡아주는 임무인 수륙지획(水陸地劃) 주사(主事)를 맡았다. 따라서 그는 이여송의 일급 참모로서 항상 군진(軍陳)¹를 펴는데 조언을 했고, 조선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는 조선군과도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가져왔다. 정유재란 때 두 아들과 함께 원병을 와서 공을 세웠는데 난이 평정되고 난 후, 조선에 귀화하였다. 조선에 귀화한 두사충은 대구에 정착하면서 현재의 중앙공원 일대를 하사 받았는데 경상도 감영을 대구에 옮기자 그 땅을 내어놓고 현재의 계산동(桂山洞) 일대로 두씨들의 거주지를 옮겼다. 그러나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最頂山[현 대덕산])밑으로 거주지를 옮겨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이고 단(壇)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관복을 입고 고국의 천자(天子)를 향해 배례(排禮)를 올렸다고 한다. 그의 사후 자손들은 두사충의 유언에 따라 형제봉(兄第峰)기슭에다 묘소를 쓰게 되었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2월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모명재라고 한 것은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고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백천유수필지동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인데 이 것 또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두사충의 묘소앞에 있는 비문을 별도로 다시 새겨 모명재 앞뜰에 신도비를 세웠다. 이 비문은 이순신 장군의 7대손인 삼남 수군통제 이인수가 지었는데, 임란 당시 이순신과 두사충의 친밀한 관계가 후손들에게 까지 접촉을 갖게 했음을 알 수 있다. 모명재는 네모 반듯한 대지에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앞쪽에 모명재가 위치하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 기와집이다. 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들였으며, 앞쪽에는 반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건물 정면의 여모중방(대청앞 마루바닥에 가로지른 안방)밑은 붉은 벽돌을 쌓아막았다. 가구(架構)는 5량가의 견실한 구조로 종보 위에는 원형 판대공을 세웠으며 앞쪽의 창방(목조건물의 기둥 위에 가로 건너질러 연결하고 평방 또는 화반, 소로 등을 받는 가로재)과 장혀(도리를 받치는 긴나무)을 끼워 장식하였다. 20세기 초 대구지역 재실 건축의 형식을 잘 보여준다.

문의처053-742-3178
녹동서원

조선으로 귀화한 일본 장수 김충선을 기리는 서원 ‣ 임진왜란 때 귀화한 모하당 김충선을 추모하기 위해 1789년에 건립 ‣ 경내에는 녹동사, 향양문, 유적비, 서원 뒤쪽 삼정산에는 김충선의 묘소가 있다 ‣ 달성한일우호관, 김충선의 귀화 후 활약상을 보여주는 역사관, 체험실 등이 있다

문의처053-767-57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