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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충장군 가선대부 보광당

건립은 1651년(효종 2년)에 절충장군 가선대부 보광당 전명대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파계사 경내 다른 비석과 함께 있다.

문의처 053-984-4550
삼가헌

충정공 박팽년(1417∼1456)의 자손들이 정착하여 온 박씨마을 묘골과 낮은 산 하나를 경계로 하여 자리잡은 조선시대의 주택이다. 넓은 터에 대문간채·사랑채·안채·별당·연못이 배치되어 있다. 충정공의 11대손인 삼가헌 박성수가 영조 45년(1769)에 사랑채를 짓고 자신의 호를 현판으로 걸어 삼가헌이라 이름지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건물이 사랑채이며, 안채는 사랑채를 거쳐야 출입을 할 수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트인 ㅁ자형의 구조를 하고 있으며 안채로 드나드는 중문채와 곳간으로 연결이 되어있다. 사랑채는 ㄱ자형 평면으로 넓은 대청과 골방이 딸린 온돌방 2칸·마루방·청지기방을 두었다. 안채는 ㄷ자형으로 부엌·안방·대청·건넌방·개방된 툇마루 등으로 꾸몄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서쪽으로 장독대·곳간채·안변소가 자리잡고 있다.

문의처 053-582-4672
박성신 도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아니하고 학문에만 전념한 대암 박성선생을 위한 신도비로 인조 18년(1700)에 사림 75명이 모여 건립하였다. 비문의 찬은 영의정을 지낸 김세렴이 하였고 글은 전진사 영이 썼다. 비의 크기는 길이 220cm, 구판에서 비두까지 350cm, 폭 90cm이다. 비두는 용트림으로 높이 88cm, 폭 120cm이며 구판의 길이는 175cm, 폭 110cm 이다. 구지면 도동리에 소재하고 있다.

문의처 053-668-3162
메가우소장 공덕비

달서구 성당동 산 154번지(두류공원 내)에 소재한 이 비는 6.25 전쟁 당시 주한미군 후방기지 사령관으로 재임한 E.J. 메가우 소장의 전공과 전쟁 직후 빈민구제사업 및 질서유지 등을 위해 남긴 불멸의 공훈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대구시민과 예하 부대원들의 이름으로 1955년 3월 30일 달성공원 내에 존치해 오다가 1978년 12월 23일 달서구 두류동 571번지로 이전하였는데 우방랜드 설치로 1991년 현 위치로 2차 이전하였다.

문의처 053-625-1949
대구도동 측백나무숲

불로동에서 동쪽으로 2km쯤 가면 길 오른쪽에 내를 낀 향산이 나타난다. 이 산의 북쪽으로 비탈의 높이가 100여m에 길이 60여m의 낭떠러지를 온통 덮고 있는 울창한 숲이 바로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제1호로 지정된?동구 도동 측백수림이다. 측백나무는 측백나무과에 딸린 상록교목으로 큰 것은 높이 20m에 이른다. 이곳의 측백수림은 측백나무의 남한지로써 식물지리학상의 중요성으로 인해 1934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또한 이곳은 조선조 대구가 낳은 대학자인 서거정 선생이 찬미한 대구 10경중 한곳으로, 측백수림 아래에는 옛날 대구에서 영천·경주로 가는 길이 있어 절벽 아래를 흐르는 계곡수와 더불어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어 행인들의 피로를 덜어 주었다고 한다.

문의처 053-983-2301
대구향교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공자의 가르침이 깃든 배움터‣ 조선 건국과 더불어 1398년 지금의 중구 교동에 대구향교 창건‣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1932년 지금 자리에 대성전과 동서무, 명륜당 재이건. 1995년 유림회관이 신축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됨.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단아한 건물과 잘 가꿔진 조경 덕분에 조용히 사색하며 거닐기 좋다"

문의처 053-422-8700
동화사 보사계 유공비

이 비는 동화사의 보사계가 많은 공이 있음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동화사 입구에 자리하고 있다. 비신(碑身)은 연회색 수세암이며, 비개(碑蓋)는 없고, 비부(碑趺)는 높이 140㎝, 폭 79㎝, 두께 57㎝이다.

문의처 053-982-0101-2
대구부수성비

조선 고종 때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해 온 김세호가 대구부성을 수리한 후 그 기념으로 세운 비이다. 대구부성은 영조 때 경상관찰사 민응수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는데 그 후 성이 훼손되어도 제대로 보수가 이루어지지 않던 것을 김세호가 수리한 것이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비문에는 공사에 관한 내용과, 유공자에게 상을 내린 일이 적혀 있다. <좀 더 알아보기> 민응수가 대구읍성을 쌓고 난 뒤에 수성창(蓚城倉)을 부분적으로 수리하였으나 근본적인 수리는 못했다. 그러다가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 도호부사로 부임했던 김세호(金世鎬)가 크게 보수하게 되었다. 그는 부임한 이듬해인 1870년(고종 7년) 봄인 3∼4월 경에 수리를 시작하여 그해 11월에 끝냈다고 수성비에 적고 있다. 또, 수성비 비용이 민간 기부금으로 충당했다는 것으로 보아 수금에 있어서 강제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수성비에 의하면 원래 것보다 높이를 더 높이고 확장한 결과 신축이 97보, 개축이 118보, 보축(補築)이 1,409보, 치첩 신축이 2,608보, 문루 및 공해, 신건(新建)이 72간, 중건이 37간, 중수가 57간 공해 각처의 보수가 256간이었다. 이때 동서남북 대문의 문루를 고쳐짓는 것 외에 성벽 위에 6개의 누각을 세웠다. 또, 모든 누(樓)는 단청을 올리고 치첩은 백회(白灰)로 분장하였으며, 공사가 끝난 뒤 성대한 낙성식도 열고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여 유공자를 포상하였다고 수성비는 적고 있다. 현재 영남 제일관문 앞에 영영축성비(嶺營築城碑)와 함께 서 있는 수성비는 당시 관찰사이던 김세호가 글을 짓고 글씨는 수성을 하면서 책응간역(策應看役)으로 있던 절충장군(折衝將軍) 최석로(崔錫魯)가 쓴 것이다. 원래 이 비석이 세워진 곳은 남문 밖 민응수가 영영축성비를 세운 바로 곁이었으나 이 수성비 역시 1906년 대구 읍성이 헐리면서 갈 곳이 없어졌다가 1932년 현재의 대구 향교 경내로 이전되었으나 다시 영남 제일관문이 중건되면서 만촌동으로 이전했다. 청색 화강석인데 팔작지붕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비부는 황백색 화강석으로 장방형이다.

문의처 053-666-2172
김처정 재령이씨 효열각

효자 청도인 김처정은 재질이 탁월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세인의 칭송을 받아 왔었다. 부친께서 불치의 병으로 30년간 신음하였으나 하루같이 지성으로 봉양하였는데 병세는 더욱 더 악화되어 음식도 먹지 못하고 20년간 인유(人乳)만 먹고 살았다. 그는 인근마을 유모를 찾아다니며 인유를 얻어 봉양하였는데 하루는 메추리를 먹고 싶다하여 그것을 구하려 할 때 매가 메추리를 잡아 집 앞에 던져주어 그는 기뻐하여 봉양하였다. 이를 나라에서 알고 정려를 내렸다. 열녀 재령 이씨는 김처정의 손자 김여택의 처로서 평소에 효성이 지극하고 부덕을 겸비하였다. 그런데 남편이 우연히 병을 얻어 신음하자 극진히 치료하였으나 마침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에 그녀는 뒤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상중에 애기가 있어 참아 오다가 출산 후 식음을 전폐하고 자진하여 뒤를 따랐다. 그 후 숙종께서 효심이 지극한 효자와 열녀의 깊은 뜻을 헤아려 나라에서 세운 효열각이다.

문의처 053-667-21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