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고종 때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해 온 김세호가 대구부성을 수리한 후 그 기념으로 세운 비이다. 대구부성은 영조 때 경상관찰사 민응수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는데 그 후 성이 훼손되어도 제대로 보수가 이루어지지 않던 것을 김세호가 수리한 것이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비문에는 공사에 관한 내용과, 유공자에게 상을 내린 일이 적혀 있다. <좀 더 알아보기> 민응수가 대구읍성을 쌓고 난 뒤에 수성창(蓚城倉)을 부분적으로 수리하였으나 근본적인 수리는 못했다. 그러다가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 도호부사로 부임했던 김세호(金世鎬)가 크게 보수하게 되었다. 그는 부임한 이듬해인 1870년(고종 7년) 봄인 3∼4월 경에 수리를 시작하여 그해 11월에 끝냈다고 수성비에 적고 있다. 또, 수성비 비용이 민간 기부금으로 충당했다는 것으로 보아 수금에 있어서 강제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수성비에 의하면 원래 것보다 높이를 더 높이고 확장한 결과 신축이 97보, 개축이 118보, 보축(補築)이 1,409보, 치첩 신축이 2,608보, 문루 및 공해, 신건(新建)이 72간, 중건이 37간, 중수가 57간 공해 각처의 보수가 256간이었다. 이때 동서남북 대문의 문루를 고쳐짓는 것 외에 성벽 위에 6개의 누각을 세웠다. 또, 모든 누(樓)는 단청을 올리고 치첩은 백회(白灰)로 분장하였으며, 공사가 끝난 뒤 성대한 낙성식도 열고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여 유공자를 포상하였다고 수성비는 적고 있다. 현재 영남 제일관문 앞에 영영축성비(嶺營築城碑)와 함께 서 있는 수성비는 당시 관찰사이던 김세호가 글을 짓고 글씨는 수성을 하면서 책응간역(策應看役)으로 있던 절충장군(折衝將軍) 최석로(崔錫魯)가 쓴 것이다. 원래 이 비석이 세워진 곳은 남문 밖 민응수가 영영축성비를 세운 바로 곁이었으나 이 수성비 역시 1906년 대구 읍성이 헐리면서 갈 곳이 없어졌다가 1932년 현재의 대구 향교 경내로 이전되었으나 다시 영남 제일관문이 중건되면서 만촌동으로 이전했다. 청색 화강석인데 팔작지붕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비부는 황백색 화강석으로 장방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