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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제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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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제일관4
영남제일관5

주소 대구광역시 수성구 팔현길 248

전화번호 053-666-2172

지방행정관서가 있는 곳에 평지에 축성된 대구 읍성(邑城)은 1590년(선조23년)에 처음 만들 때는 흙으로 쌓은 토성(土城)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허물어진 뒤 1736년(영조 12)에 돌로 다시 쌓아 석성(石城)을 만들었다. 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정문을 두었는데, 동문은 진동문(鎭東門), 서문은 달서문(達西門), 남문은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 북문은 공북문(拱北門)이라 하였다. 1906년 읍성이 철거될 때 성문들도 함께 철거되었다. 지금 대구제일의 향토상징 관문으로서 금호강과 함께 대구시민들이 대자연의 운치를 마음껏 즐기는 곳이다. <좀 더 알아보기> 한국에서는 옛날부터 구릉과 산성을 방수의 요충으로 중시하고 평지에 있는 취락에 성지를 축조하는 예가 드물었다. 지금 시내에 있는 달성은 삼국시대 이래 여러 차례 가축된 바 있지만 이것은 읍성이 아니고 오히려 관아를 중심으로 방수한 것이었다. 대구의 평지에 성축 한 것은 부사로 취임한 윤 현(尹峴)때 일이다. 그는 선조 24년에 선산 군위 안동의 3개 읍민을 징집하여 대구부민과 더불어 축성을 완료했다고 대구부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토성은 1592년(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란으로 파손되고 그후 140년이 지난 영조 12년에 석성이 새로 축조되었다. 1601년(선조34년)이후부터 한말까지 대구에 경상동 관아가 있었다. 그것은 그동안 왜란을 겪으면서 대구의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중요성이 인식된 때문 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조 때까지 백수십년이 지나도록 임진왜란 때 허물어진 대구부성의 재축조가 실현되지 못했다는 것은 조선왕조 후기 사회의 무력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석축의 대구읍성은 경제력이 회복된 영조 12년에 축조 되었는데 영조 11년에 대구로 부임한 경상도 관찰사겸 대구도호부사 민 응수의 건의를 조정에서 받아 들이고 영조의 윤허를 얻게 된데서 실현을 보게 된 것이다. 축성비에 의하면 영조 12년 4월 8일에 채석을 시작하고 4월 25일에 본성채를 이룩하고 6월 6일까지 여첩(女堞)을 완공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성에는 동,서,남,북의 4정문이 있고, 문에는 본루를 세웠는데 동은 진동문, 서는 달서문, 북은 공북문이라 칭했고, 특히 남문에는 영남 제일관의 편액(扁額)을 달았다. 이밖에 동서에 두 개의 암문이 있었다. 영조 12년에 석축된 읍성은 몇 차례의 수축이 있어서 온전하게 보존해 왔으나 광무 10년과 11년 사이에 남문과 더불어 완전히 헐리고 말았다. 지금 남아 있는 당시의 남문 사진을 보면 성벽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석축기대(石築基臺)를 세웠으며 규모는 하층의 정면 측면이 모두 세칸이다. 남문을 처음 축조한 사람이 관찰사 민 응수이며 그는 경상도 관찰사로 취임하기 전에 전라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전주 풍남문(豊南門)을 세웠다. 대구시는 1980년 남문인 영남 제일관을 수성구 만촌동 금호강변에 옛 모습을 살려 중건함으로 조상의 얼을 시민에게 전하고 있다.

영남제일관 - 이용시간, 장애인 편의시설, 한국어 안내서비스, 외국어 안내서비스, 주차시설,
이용시간 제한없음
장애인 편의시설 장애인화장실, 장애인 주차장
한국어 안내서비스 안내 서비스 없음
외국어 안내서비스 안내 서비스 없음
주차시설 공용주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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